23. 아버지

by 문객

"샘님, 너무 늦었죠?"

"괜찮아요. 어머님 덕분에 사찰 안에서 좋은 경험 잘하고 있어요."

"너희들은 여행 잘하고 있지?"

"네"

"샘님. 저기 대웅전 옆에 작은 암자 하나가 있는데 잠시 거기로 좀 가보게요."

"네, 어머님."

"너희들도 같이 가자."

그녀가 문을 열고 대웅전을 나서며 옆길로 향한다. 산속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벌써 바깥엔 어둠이 찾아왔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암자로 안내한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묵묵하게 암자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 위로 별빛 몇 개가 어둠을 밝힌다. 경내엔 가끔 시냇물 소리와 고요한 스님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깬다. 암자엔 촛불로 불을 밝힌 듯 주황색 불빛이 방안을 밝히고 있다. 그녀가 먼저 문을 열고 우리를 방안으로 인도한다. 방에 들어가자 스님 한 분이 불상을 바라보며 불공을 드리고 있다. 그녀는 말없이 옆으로 가 방석 세 개를 바닥에 놓아준다. 루머와 머루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가 내어준 방석 위에 앉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떻게 도량에서는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신지요?"

"네, 스님."

"선생님은 이곳이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예전에 한번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스님께서 거처를 마련해 주셔서 며칠간 참 귀한 시간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네, 선생님에게 이 사찰은 어떤 인연이 있나 봐요. 이렇게 또 만나게 된 것을 보니."

"네, 스님."

"너희들은 선생님 제자이고?"

"네"

"당신도 편하게 앉구려"


당신이라고. 옆에 서있는 그녀에게 스님이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혹시 이 분이 머루의 아버지이신가? 당신이라는 말에 루머와 머루도 순간 당황한 듯 스님을 쳐다본다. 머루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졌기에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체 우리를 한번 바라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염주를 하나하나 만지며 두 입술 사이로 조용히 마음의 언어를 풀어낸다. 정말 저 스님이 머루의 아버지일까? 잠시 방안엔 알 수 없는 정적이 쌓여간다. 머루는 '당신'이라는 두 글자에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스님과 그녀를 쳐다보지 못한다. 말 못 할 울분이 쌓이는 것인지, 잠시 후 머루의 얼굴 사이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스님은 고개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머루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다가 불상 옆에 쌓아둔 작은 나무 합판을 우리 앞에 하나씩 나눠주고는 목장갑과 조각칼 같은 것을 준비해 합판 옆에 놓아준다.


"머루야, 그만 울고. 스님 한 번 쳐다보렴."


머루가 흐르던 눈물을 손으로 닦은 후 스님을 바라본다. 스님이 다친 머루의 한쪽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머루는 잠시 스님을 바라보다 또 눈물이 나는지 한 손으로 눈을 비빈다.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머루에게 휴지를 건넨다. 루머는 한 손으로 머루의 손등을 잡아준다. 고요한 방안에 침묵과 함께 복잡한 서로의 감정이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한 올 한 올 깊어만 간다. 잠시 후, 스님이 마음을 가다듬고 머루의 손을 잡아주며 등에 대고 토닥토닥 위로의 몸짓을 전한다.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던 그녀의 눈빛에도 어느새 눈물방울들이 맺혀 간다. 스님은 마음을 정제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준비한 합판 위에 하얀색 분필로 마음 심자를 한자로 쓴다.


"선생님, 그 조각칼로 제가 써 준 마음 심자를 천천히 파 보세요. 너희들도 같이 한번 해 보자."


루머가 머루의 손안에 조각칼을 쥐어준다. 머루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조각칼로 스님이 써 준 글자를 새겨본다. 나무의 결이 단단한 탓인지 조각칼이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스님과 그녀는 옆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본다. 안양에서 봤던 그녀의 눈빛과는 다른 모습이 풍긴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스님에게 말을 건넨다.


"스님, 이젠 머루와 관련된 사연 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시만 고요함 속에 머물다 그 글자를 새긴 후에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네"


아이들도 조심스럽게 4획의 마음 심자를 한 획씩 파헤쳐간다. 때때로 너무 많은 힘을 주다 보면 작은 점 하나가 옆으로 퍼져 글자의 모양을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된다.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스님이 표시한 선을 따라 적당한 힘을 준 채 한 획씩 시간에 구속받지 않은 채 다시 처음부터 글자를 새겨본다. 마음이 평온해질수록 힘을 덜 줘도 글자가 부드럽게 새겨진다. 아이들도 어느새 요령을 터득한 것인지 합판의 밑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나무의 결을 따라 한 획씩 새기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은 선생님 마음을 알고 있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제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루머는?"

"저는 그냥 마음 하면 답답한 감정만 떠올라요."

"머루는?"

"모르겠어요."

"아마 이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길 없이 길을 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가고 오는 지를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린 늘 마음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해 마음으로 끝납니다."


갑자기 머루가 고개를 들고는 스님에게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마음공부 잘해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나요? 스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 힘겹게 살고 있는데, 스님만 마음공부 잘해서 편안하게 살면 그게 깨우침인가요?"


그녀가 머루 앞으로 다가와 머루를 안고는 두 손으로 머루의 등을 토닥거린다. 스님은 말없이 그녀와 머루를 바라만 본다. 밖에선 가냘픈 밤바람에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얇은 미풍에 적셔오는 댓잎의 숨결처럼 처마 밑 풍경소리가 갈 곳을 잃은 채 방안을 기웃거린다. 스님의 자세와 눈빛에는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스님은 그저 울분을 토하는 머루를 낮은 자세로 바라만 본다. 마치 스님 뒤의 불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스님은 말없이 머루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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