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독재와 전체주의가 종식 되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요즘은 하루 하루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가 이미 이루어졌지만, 소수의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이 일이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잠시 잠깐이면 끝날 허상에 불과할까?
근래 광장에 나오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난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의 위기를 결코 경홀히 여기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탄핵 정국이 마무리 된다 하더라도 시한폭탄은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런 시한 폭탄을 왜 제거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제거하지 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사회는 근원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한다. 다수결로 대표되는 민주주의가 선진화 될수록 소수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대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이것은 위험이 아니지만 말이다)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전체주의는 언제든 민주주의 내부에서 기생하여 자라갈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라며 민주주의 사회라면 자신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악마화하고, 필요하면 폭력을 사용할 필요도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긴다.
전체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거짓을 선동하는 일도 거침없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처음 들을 땐 믿지 않더라도, 반복하면 믿을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방법은 최대한 모두를 존중해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쉽게 제재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김누리 교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제도로서의 전체주의는 끝났으나 태도로서의 전체주의 사회”라며, 이를 ‘후기 전체주의’라고 정의한다.
현실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도로서의 전체주의를 멸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 그것을 시도한다면 그또한 민주주의가 망가진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사회적 위기가 심각해진 사태를 감안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한계, 기존 제도의 한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을 ”언젠가 좋아지겠지“라고 낙관하거나, ”어쩔 수 없잖아“라고 방관한다면 제도로서의 전체주의를 다시 목도하게 될 것이다. 아니 우린 그런 시도를 바로 얼마 전에 목도했다.
이런 사회적 위기 속에서 교회는 판단하지 말고 기도하자는 식의 무책임한 말들을 쏟아낸다. 아니 실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무능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의 문제를 이해하거나, 통찰할 지혜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아니 지금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가 “우리가 예배하는 것에만 지장이 없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을 볼 때면 깊은 시름이 마음 속에서 올라온다. 부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