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1:37)
제자란 가르침을 받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제자가 되기로 결정할 수 있지만, 스스로 스승이 될 수는 없다.
오늘 우리 사회에 좋은 스승이 있는가?
분명 좋은 스승, 어른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좋은 스승이 되었는가?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사물의 이치에 어두울 수 있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위정爲政 2.15
공자가 자기 제자 염유에게 가르친 말씀이다. 실용적인 능력은 뛰어났지만, 깊은 깨달음과 지혜, 임금과 백석을 향한 사랑이 부족한 제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공자의 질책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오늘 한국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대부분의 주역들은 그 대단한 서울대 출신들이다. 엘리트 주의에 함몰된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는 요즘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왜 좋은 스승을 만나기 어려진 것일까?
진정한 의미에서 배움이란 지식 습득 그 이상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유(思惟)가 없는 배움은 그저 죽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오늘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법기술자들은 모두 법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이 근원적 물음 앞에 멈춰서서 깊이 숙고한 법조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법조인들은 그럴 시간에 사법고시를 위한 법문항 하나라도 더 습득하기 바빴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철저히 실용주의, 능력주의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깊은 사유와 배움의 쓸모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지금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러한 토양에서 자라는 앞으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사회는 어떨까?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사회에서 사유와 배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니 어쩌면 AI의 등장으로 배움조차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는 더 이상 깊은 사유와 배움을 주지 못한다. 아니 일반 사회의 강연이나 독서모임 보다도 못한 가르침으로 가득차고 있다. 그저 싸구려 감성팔이 또는 모호하고 추상적 언어로 가득한 궤변리 교회를 가득채우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 우두커니 서서 머무를 수 있는 기독교인들이 필요하다. 그저 교회를 성장시키고, 더 큰 사역을 하려는 욕망에 물든 교회는 이제 그 생명을 다했다.
이제는 이런 물음 앞에 서는 사람,
이런 물음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좋은 스승들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