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과 1027 광화문 집회에 대한 단상
24.10.27 한국 개신교 목사들은 광화문 광장에 200만 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불러 모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한국 교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집회의 홍보를 위해 한국에 내로라하는 대형교회와 소위 개신교 셀럽들도 동참하며, 이슈몰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200만 명은커녕 100만 명의 절반 수준도 모이지 않았다. 경찰 추산으로 23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이 또한 적은 숫자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23만 명이나 되는 숫자가 광화문 광장에 모이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소위 “1027 광화문 집회”의 주된 이슈는 ‘차별금지법’이었다. 실은 작금의 한국 개신교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한 국가들이 엉망이 되었다는 엉터리 뉴스를 양산하는 발원지이다. 대표적인 가짜 뉴스 중 하나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런 설교를 하면 경찰에 잡혀간다는 이야기다.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가짜뉴스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가짜뉴스와 선동에 한국 개신교는 앞장서게 되었을까?
한국 개신교의 한 가지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문자주의’이다. 이는 성경이 쓰인 시대나 문화와 같은 맥락을 무시하고 오롯이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를 맹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고로 웃픈 이야기지만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시대의 우주관을 조금만 이해하면 왜 성경이 지구를 평평하게 그리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구평평설을 믿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맹신하려는 사람들은 교회에 흔히 볼 수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동성애, 여성, 진화론과 같은 문제들에 대하 굉장히 경직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신학적-문화적 바탕을 기반으로
23만 명의 개신교인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작년 10.27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혐오와 차별을 쏟아내는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는 강대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것은 짐승처럼 살겠다는 것입니다.”
유튜브로 그 장면을 보다가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듯이 광화문에 나와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쏟아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와 기도는 ‘사랑’을 말하지만, 혐오와 차별로 얼룩져 있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기독교적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달리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말하는 사랑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아니 또 얼마나 위선적인가?
만약 우리 시대에 한국 개신교가 몰락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폭력성과 위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저주와 혐오로 타인을 난도질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 중심에 한국 개신교인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은 앞으로 한국 개신교는 더욱 심각하게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섬처럼 존재하는 한국 개신교의 민낯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늘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을 더욱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아니 어쩌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한국 개신교가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우리 사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분은 기세등등한 광화문 집회에 가셔서 태극기를 흔드실까 아니면 차별과 혐오로 난도질당한 이들의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실까?
200만이라는 숫자로 힘을 과시하려던 한국 교회가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꼭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고 싶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