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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개신교(극우 개신교)의 3가지 특징

극우 개신교를 고발합니다 #2

by His table

광화문은 “빛이 널리 비춘다. “라는 의미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한국에 관광을 오는 이들이 꼭 찾는 명소 중 한 곳이 바로 광화문이다.

늦은 밤 달빛과 조명에 비추인 광화문은 실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많은 연인들의 사진 배경이 되곤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화문은 언제부터인가 극우 개신교가 집결하는 장소가 되었다.

심지어 언제부터인가 개신교인 사이에서 상대방에 사상을 검증할 때 이렇게 묻곤 한다.


“혹시 너 광화문 나가는 거 아니지?”


요즘은 극우 개신교도 분열이 일어났다고 한다.

소위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파와 손현보 목사의 여의도파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는

교회 밖에서도 주요한 이슈가 되었으니 개신교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또 개탄스러운 일이다.


실은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태극기 부대는 개신교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물론 근래에는 대통령 탄핵과 관련하여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추어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그들은 개신교 내에서도 극성인 사람들만 참여하는 특이한 사람들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 개신교에 꽤 많은 비율이 극우 개신교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탄핵 국면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슬픈 진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들은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사법부를 대표하는 법원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의 설교에 열광적인 아멘을 외치는 것일까?


만약 오늘 이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다면,

한국 개신교가 이를 똑바로 직면하고 비판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국 교회는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광화문 주동자들 곧 극우 개신교 목사들의 설교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적인 면이 있다.


1. 과도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실 인식을 망가뜨리는 종말론과

그에 상응하는 음모론


2. 반공의식과 자본주의를 우상화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자주의, 근본주의적 성경해석


3. 확증편향을 불러일으키는 왜곡되고 뒤틀린 역사의식.


첫째. 우선 극단적 종말론과 그에 상응하는 음모론은 한국 교회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는 폭탄이었다. 시한부 종말론 또는 조건부 종말론에 빠진 한국 개신교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같은 음모론에 빠져있다가 2010년대 이후에는 갑자기 종북과 반공주의에 물든 음모론에 매몰되었다.


이런 음모론을 주동하는 개신교 목회자 또는 유명 강사들이 있는데 실명을 거론하진 않겠다. 다만 그들은 언제나 극단적 종말론으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해괴한 음모론을 전파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불려 나갔다.


문제는 애석하게도 한국 개신교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놀음에 놀아났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한국 개신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종말론에 위기감을 느끼고, 음모론에 광기를 발하는 것일까? 여기서 극우 개신교의 두 번째 특징적인 면이 작동한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문자주의,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은 극단적 종말론과 해괴한 음모론에 힘을 불어넣는다. 오늘 한국 개신교가 빠져있는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의 위험성을 간단한 예로 들어보겠다.


구약 성경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그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다. 신학자들은 이런 말씀들을 역사비평, 문학비평 등을 사용하여 그 속에 담긴 신학적 함의 곧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 극우 세력을 준동하는 비신학적 목회자들은 이 본문에 자신들에게 대입한다. 예컨대 자신을 모세로,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스라엘 민족이라 여긴다. 그럼 자연스럽게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이들은 말살해야 하는 가나안 민족이 된다.


이런 성경해석 방법론은 오늘 한국 교회에 너무나 자주,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누군가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성경해석은 쉽게 ’악마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보수적 또는 극우적 한국 교회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모든 이들을 악마화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성경 해석에 기인한다.


그저 모세를 윤석열로, 이스라엘을 대한민국으로, 말살할 가나안을 북한, 중국, 러시아 또는 민주당으로

바꾸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다.


개탄스럽게도 오늘 한국 교회에는 이런 위험한 성경해석을 듣는 청중들이 ‘아멘(믿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을 연발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극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프로세스가 있다면 극단적인 문자주의 성경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사랑과 공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현실을 인식하는 건강한 의식을 고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문자주의적으로 성경해석을 하며 생기는 가장 큰 병폐는 사실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 중 극단적인 극우 성향을 가진 이들은 ‘사실’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중국이나 북한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국회의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한국을 공산화시킬 것이고, 이를 위해 선거 시스템조차 망가뜨리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맥락을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역사의 1차 목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전후의 맥락과 그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또는 해석은 2차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오늘 극우 개신교가 가진 역사의식은 어디에 있을까? 단언컨대 철저히 역사적 사실보다는 편향적인 평가와 해석에 매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역사 인식을 좌, 우 또는 보수와 진보라는 선을 긋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각해 보라 박정희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하면 진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비판하면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이런 흑백논리가 얼마나 비역사적 관점인지 이해할 것이다.


오늘날 극우 개신교의 뒤틀린 역사의식은 과거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한다. 그저 ‘가짜뉴스’ 또는 ‘거짓’으로 치부할 뿐이다. 정작 자신들이 믿는 것이야말로 가짜뉴스라고 증명되고 있다는 것도 외면한 채로 말이다.


가장 슬픈 것은 한국 극우 개신교의 몇 가지 잘못된 단상을 고발했지만 나 또한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늘 극우 개신교는 지나치게 뒤틀려있다. 어쩌면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가 아닐까?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돌이키는 그런 변화 말이다. 기독교는 이를 ‘회개’라고 부른다. 그렇다 우리에겐 진정 회개가 필요하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 나라는 우리와 멀리 존재할 것이다.


기도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오늘 작은 소리로 기도해 본다.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추락시키는 저들이 자신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달라고 말이다. 부디 이런 호소가 오늘 한국 교회 곳곳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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