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대학교 3학년인 딸이 요즘 고민이 많다고 한다. 딸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을 부전공하고 있지만, 경제도 경영도 도통 어렵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게 뭐냐는 물음에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며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딸의 이러한 대답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내게 답답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식이 잘되기를 희망하는 부모의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선택하면 더 좋을까에 대한 세대 간 직업에 대한 선호도 차이도 아니다. 난 여태껏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失機했지, 하고 싶은 게 없어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다는 딸의 말이 너무 신기하고 한편으론 답답하기만 하다.
부녀지간이라 할지라도 근본 성향이 다른 걸 가지고 ‘넌 왜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는 없어 한참을 머뭇거렸다. 주춤거림은 자연스레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실 난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관심이 가면 곧바로 덤벼드는 성격이라 남들보다 경험은 많지만, 열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쉽게 타버렸다. ‘그래! 아주 늦지만 않는다면 하고 싶은 걸 늦게 발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부모로서 조바심일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빨리 얻고 싶어, 기존에 읽었던 명심보감과 법정 스님의 책을 뒤적였다. 그리고 요즘은 명심보감만을 반복해서 읽고 있다.
명심보감은 한문 공부를 위해 샀던 책인데, 지금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읽고 있다. 읽는 목적이 다르니 똑같은 글귀에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찾는다. 그럴수록 나는 명심보감의 늪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명심보감에 꽂혀 있다고 보는 게 적당한 표현일 것 같다.
퇴근 후 가끔 독서하며 다큐멘터리 보는 걸 제외하면 하루 종일 명심보감만을 생각한다. 오늘까지 원문과 해설이 함께 실린 책을 19번 회독했다. 19번이면 책의 내용에 대해 익숙할 만한 시간인데도 전혀 새롭게, 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는 문구도 있다. 이것이 고전의 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고전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필경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독서의 반복으로 깨달음의 묘미를 느끼는 것도 어제는 지루했는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복해서 공부할 때 나를 깨우치던 글귀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글귀로 둔갑한다면 또 어떤 느낌과 내용으로 나를 깨우칠까. 이런 아주 단순한 생각이 내게 글을 쓰게 만들었다. 더디겠지만 오늘부터 명심보감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한다. 아주 천천히.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옛 성현들의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 엮은 고전이다.
책의 유래로는 고려 충렬왕 때 추적(秋適)이라는 고려의 학자가 1305년 처음 편찬했다는 설과 중국 명나라 홍무제 때 범립본(范立本)이라는 명의 학자가 1393년 편찬했다는 설이 있다. 명심보감은 기존에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던 성현들의 책에서 후손들이 읽고 수신할 만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각각 만들어져 읽히던 수많은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인지도가 있는 위의 두 학자가 편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명심보감은 한 개인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 책이 훌륭한 고전이 될 수 있는 바탕이다. 성현들의 지혜를 한 곳에 모아 놓은 책이니까. 편집자에 의해 후손들을 위해 성현들이 머리를 맞댄 꼴이 되었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을 엮은 이의 가장 큰 보람 아닐까 생각한다.
명심보감은 유교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사상까지 아우르며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도덕적 수양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의 올바른 자세를 제시하여 독자들이 바르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개인에게도 필요한 책이지만 바람직한 사회와 그 사회의 통합을 바라는 정치가들에게도 이 책의 보급은 필요했을 것이다.
2500년 전 명심보감 속 성현들의 글귀는 시공을 초월해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그들의 글귀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와닿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세상은 변해도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는 방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