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28일, 충주 달천평야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28일, 충주 달천평야
달빛이 능선 위에서 벗겨지듯 사라질 무렵,
일본군은 조령의 비탈을 짓이겨 내려왔다.
안개와 흙먼지가 입 안으로 씹혔다.
고니시가 말고삐를 짧게 잡아당기고,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중군 정렬. 철포(鉄砲) 화승 점검.
좌익—소 요시토시,
달천 물가의 둔덕을 타라.
간격 스무 보, 깃발 낮춰.
우익—마쓰우라,
상목림의 그림자를 따라 펼쳐라.
기치(旗幟)는 접고, 북은 숨겨라.
아리마는 별동으로 후방에 대기.”
그는 북소리를 일부러 낮췄다.
안보를 넘자 골짜기 끝이 확 열렸다.
단월역을 통과하며,
그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비어 있는 고개들이 그림자처럼 이어졌다
—조령, 대안보, 잔도.
그들은 길을 버렸다.
“정찰대.”
고니시가 손을 들며 말했다.
“민가에 불을 놓지 말고, 연기만 띄워라. 바람을 보겠다.”
연기가 낮게 누웠다 일어나고,
곧 눈앞의 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천은 얌전했지만, 물가 가까이는 거의 늪이었다.
논두렁은 이랑(畦)마다 끊겨 길을 토막 냈고,,
갈대는 허리까지 차올라
바람만 스쳐도 바다처럼 흔들렸다.
이 평야는 말이 무리 지어 펼쳐질 땅이 아니다.
말은 필연히 길게 늘어설 것이다.
길게 늘어선 줄은, 표적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장의 도식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신겐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어쩔 수 없겠군... 이제 조선의 운명은 다했는가..”
고니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북쪽 소나무 산에서
푸른 깃발들이 떨어져 나왔다.
조선군의 본진이 산에 있었고,
기병이 반달 모양으로 평지로 흘러내렸다..
고니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는 명료하다—포위 섬멸.
허나 좌우에 숨긴 손은 아직 보지 못한 듯했다..
“좌익—물가의 둔덕을 따라 더 벌려.
끊어지는 게 아니라 감싸는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넓게.”
“우익—그림자처럼 바람결로 이동.
들키지 말고 측면을 잡아라.”
“중군—방패벽 앞으로 열 보.
철포 준비. 첫 사(射)는 내가 준다.”
철의 깊은 냄새,
화약의 매캐함이 코끝을 찔렀다.
병사들이 방패를 세워 바닥을 긁듯 내밀고,
장창이 뒤를 받쳤다.
갈대가 바람을 받아 일제히 고개를 숙일 때,
북쪽 소나무 산에서 흘러 내려온 푸른 깃발들이
일제히 기울며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조선 기병의 반월(半月)이
순식간에 더 크게 벌어졌고,
고시니 본대 중앙을 향해
치받을 기세로 내달려 들어왔다.
기병들의 활줄이 하얀 선으로 번쩍였고,
기병들의 투구가 파도치듯 일렁였다.
“전열, 무릎! 이열, 반무릎! 삼열, 기립
—가슴 아닌 말의 어깨를 겨냥!”
고니시의 명령이 방패 뒤로 흘렀다.
철포수들이 방아쇠 앞에 손가락을 걸고 숨을 잠갔다.
북이 한 번, 낮게 울리고—
“사(射)!”
첫 불꽃이 들판 위로 퍼졌다.
음향이 늦게 왔다.
"파앙—"
포성의 늦은 파도가 귀를 치자,
말 몇 마리가 앞다리를 접고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그 뒤의 기수는 붙들 시간이 없었다.
말과 사람이 뒤엉켜 논두렁에 비스듬히 꽂혔다.
반월의 날개가 그 지점에서 먼저 휘었다.
“장전수 전진, 장전! 둘째 열—”
“사(射)!”
두 번째 불꽃이 다시 터졌다.
이번엔 가까웠다.
삼십 보 안쪽.
탄환이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진창에 꽂혔다가 튕겨 올라 말의 복부를 스쳤다.
말들이 바늘처럼 꽂히는 통증에 몸을 젖히고,
기수들이 비틀리며 활을 놓쳤다.
놓친 화살이 허공에 짧게 솟았다가 땅으로 처박혔다
“장창, 반걸음 전진—밀지 말고 세워!”
장창선이 방패벽 사이로 이빨처럼 솟았다.
전열이 물러나지 않도록 창끝이 낮게 걸렸다.
조선 기병의 선두가 그 창끝을 보기 직전—
“사(射)!”
세 번째 포성이 불을 뿜었다.
이번엔 반월의 중앙이 꺼졌다.
말발굽이 ‘푹’ 하고 진창 속으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났다.
뒤에서 달려오던 줄은 이랑(畦)마다 끊겨
종렬로 늘어진 채 멈추었다.
펼쳐야 할 날개가 길게 드리워진 꼬리가 되었고,
꼬리는 곧 표적이 되었다.
진격은 속도를 잃었다.
“좌익, 끊어라!”
소 요시토시의 깃발이 물빛 위로 길게 뻗자,
달천의 둔덕이 칼집처럼 조여들었다..
“우익, 고삐를 잘라라!”
마쓰우라의 병력은 산그늘을 감아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중군 철포수 들은 무릎, 반무릎, 기립—
세 줄이 바늘귀처럼 교대로 불을 틔웠다.
포성 사이사이로 말의 비명, 사람의 외침,
활줄 끊어지는 소리, 장창이 가죽을 긁는 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 귀를 때렸다.
비가 더 촘촘해졌다.
빗방울이 장창 끝을 두드려 ‘톡톡’ 울렸다.
진창은 더 무거워졌고, 말굽은 더 깊이 박혔다.
반월의 오른편에서 기수 몇이
방향을 틀어 우회하려 했으나,
이랑과 물러앉은 논턱 사이에 바퀴처럼 갇혀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들의 등판을 향해,
우익 철포수의 연기가 한 번 더 고개를 들었다.
“삼열—가슴 낮춰! 눈이 아닌 목줄기!”
탄환이 말목의 거친 갈기를 쓸고 지나가자,
커다란 짐이 갑자기 꺾인 듯
말이 제자리에서 무너졌다.
뒤의 말이 그대로 그 위를 밟아 넘으며 비틀렸다.
기수의 손에서 활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장창의 끝이 눈앞에서 멈춰 섰다..
창끝이 가죽을 누르자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중앙의 조선 기병 한 떼가
마지막으로 속도를 끌어올려 정면을 찌르려 들었다.
활 대신 창을 빼어 든 자들도 있었고,
허리를 낮춘 채 말의 목을 팔로 감아
중심을 붙잡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들판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진창이 발을 잡고, 이랑이 방향을 잡았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겨우 방패벽의 그림자에 닿았을 때—
“지금! 방패 내리고—창!”
장창이 ‘쓱’ 하고 한꺼번에 내려오며,
말의 앞가슴을 눌러 세웠다.
그 뒤에서 세 번째 철포가 턱밑 거리에서 불을 뿜었다.
불빛이 얼굴에 비쳤다 사라졌다.
말이 옆으로 주저앉으며 ,
진창에 넓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윽고 좌우에서 협공이 닫혀 오자,
반월의 속은 비어 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자들은
이랑 사이의 좁은 길로 몰렸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포성이
마치 물레방아처럼 일정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총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빈칸을 메웠다.
언뜻 깃발 하나가 고꾸라지며 진창에 반쯤 잠겼다.
뒤에서 한 사내가
이를 악물고 뛰어들어 그 깃을 끌어올렸지만,
좌우의 포성이 그 자리의 공기를 다시 찢었다.
기병이 전장에서 점점 지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