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26일, 충주 조선군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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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26일, 충주 조선군 진영


초여름으로 기우는 바람이

달천의 물 비린내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4월 26일,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이

충주에 들었다.


북방에서 말굽을 달궈 오던 장수가

남쪽의 더운 김을 마주한 순간,

그의 앞에 펼쳐진 지형은 단출한 한 장의 병법서 같았다

—강과 들, 낮은 구릉, 그리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화살표.


장막 안 탁자 위로 펼친 군도(軍圖)에는

붉은 점 세 개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령으로 넘어오는 고니시.”

군관이 점 하나를 가리켰다.


“죽령의 가토.”

다른 점을 밀었다.


“추풍령의 구로다.”

마지막 점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미끄러졌다.


“우리가 셋 다 막아야 합니다.”


유숙(遊熟)한 장수가 말을 이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길은 곧장 한양으로 열립니다.”


신립은 말이 없었다.

그의 임무는 ‘지연(遲延)’이 아니라, ‘섬멸(殲滅)’이었다.


조정이 불러내린 말 한 줄이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북상하는 왜적을 깨뜨려 길을 끊을 것.’


이일이 상주에서 무너졌고,

경상 좌수영과 좌병영의 끈이 잇달아 끊겼다.

양산, 울산, 회야강—지도 위 붉은 자국은

남쪽에서부터 이미 얼룩져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장막 안 회의가 열렸다.

기름 등잔의 심지가 튀었고,

장수들의 숨이 좁은 공간을 데웠다.


김여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감, 조령(鳥嶺)을 지키시지요.”

손가락이 군도 위 문경새재를 눌렀다.


“천연의 요새입니다.

목을 틀어막으면 열이서 만이라도 못들게 하지요.

상주에서 패잔한 이일 공도 변기 조방장과

이미 고지전을 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개에서 지연전을 벌이고,

충청·강원의 군세를 제승방략대로 모으면—”


“지연...”


신립이 낮게 되뇌었다.

그의 눈이 한번 떠올랐다. 흑빛이 번뜩였다.


“나는 지연하러 내려온 것이 아니오.

길목에서 적의 선두를 찍어 꺾을 것이오.”


이일은 자리를 낮게 하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주의 패전이 아직 그의 어깨에서 식지 않았다.


대신 변기가 소매를 여며 앞으로 나섰다.


“대감, 조령만이 아닙니다.

대안보에서 단월역까지 길목이 이어집니다.

단월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잔도도 있고,

연풍·괴산·대소원으로 빠지는 길마다

매복 자리가 있습니다.

산이 도와주고 물이 막아줍니다.

거기에 말뚝을 박아두면

적이 스스로 목을 들이밀 것입니다.”


신립의 시선이 군도에서 들판으로,

다시 장막의 어둠으로 흘렀다.


북로에서 말의 발굽으로 적의 허리를 꺾던 시간들이

잠깐 그의 눈빛을 가로질렀다.

변기의 계책은 그가 배운 승리의 모양이 아니었다.


“산길은 사람의 길이오.”


그가 말했다.


“허나 적을 꺾는 것은 말,

조령은 말의 길이 아니다.”


김여물이 굳은 표정으로 맞섰다.


“달천 평야는 기마에도 좋지 않습니다.

논두렁이 많고,

강변은 갈대가 허리까지 차고,

땅은 질척합니다.

상촌 신흠의 기록에도, 군사들의 보고에도—”


장막 안 눈빛들이 서로 엇갈렸다.

‘섬멸’이라는 말이

등잔불 위로 뜨거운 막을 씌웠고

결심은 머뭇거렸다.


신립이 말을 이었다.


“평야가 아닌 조령에 진을 펴면.....

우리가 산등성마다 궁병을 박아 두고

적의 행군 열을 쪼개

적의 선봉을 그곳에 가둘 순 있다.

허나 우리도 그곳에 함께 갇힐 것이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적의 선봉을 격멸하고,

죽령과 추풍령에서 이어 오는 적들을

차례로 맞아 길을 끊어내야 하오.

그래야 한양이 온전할 것이오.”


좌중이 고요해지자,

신립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조령의 병력을 걷어 들여라.

대안보, 단월역, 잔도—모두 비우고,

충주로 모아라.

본진은 소나무 산에 두고,

달천 남쪽 평야에서 맞선다.”


신립은 장막을 젖히고 나갔다.

선한 공기가 기름 냄새를 씻어냈고,

곧이어 강 쪽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왔다.


충주 북쪽 소나무 산에 본진이 올랐다.

군막을 이어 치는 동안,

조령에 남겨졌던 병력들이 줄줄이 내려왔다.


목덜미에는 땀이 말라 소금꽃이 피어 있었고,

신발에는 산길의 진흙이 묻어 있었다.


문경의 고개들—

연풍, 괴산, 대소원으로 이어지는 험로가 비었다.


장정들은 말없이 허리끈을 조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이 아닌 듯했다.

길이 스스로 텅 빈 소리였다.


정찰을 보냈다가 돌아온 젊은 군관이

황급히 장막으로 들이닥쳤다.


“적의 기(旗)가,

단월 북쪽 월강 너머로 보인다 합니다.

적은 이미 조령을 넘고 있습니다—”


장막안에 숨이 한꺼번에 엇갈렸다.


“흉흉한 말, 군심을 흩뜨린다.”


신립의 얼굴이 굳었다.


“장정들 앞에서 다시 말하지 말라.”


젊은 군관의 목이 희끗 굳었다.

처형의 명이 짧게 내려앉았다.


장막 밖 공기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그 뒤로 정찰은 뜸해졌다.

보고는 느려졌고,

보고를 기다리는 침묵은 더 길어졌다.


4월 28일 새벽,

문경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별빛을 밟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군의 기동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인각(寅刻, 새벽 3~~5시)에 문경을 떠나 조령을 넘고,

진각(辰刻, 7~~9시)에 안보를 통과했다.


오각,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때에 충주로 내려와

단월역 북쪽 월강 언저리에 닿았다.


좁고 험한 산길을 반나절,

혹은 그 이상 쟁기질하듯 갈아 내려온 행군이었다.

그러나 그 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중앙에는 고니시의 본대가 곧게 서고,

좌군 소 요시토시는 달천을 따라

서쪽으로 신중히 살을 붙였으며,

우군 마쓰우라는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발을 넓혔다.

아리마의 별동대는 뒤를 받쳐 내려왔다.


충주의 들은 조용했다.

조령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험로는 비어 있었다.

산새 몇 마리가 자리를 옮겼고,

갈대밭이 바람 따라 한꺼번에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달천은 멀끔한 얼굴로 흐르고 있었지만,

강마루 가까이는 진창이었다.

논과 논 사이 논두렁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말발굽이 들어가면 빠지는 소리가 ‘푹’ 하고 낮게 났다.


신립은 소나무 산을 내려다보며,

장수들을 다시 불렀다.


달천 남쪽 평야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멀리 탄금대의 절벽이 강 위로 기울어 서 있었다.


문제는, 모아놓은 병력의 쓰임이었다.

그는 말의 충격력으로 적의 중심을 찍어 눌러,

진열을 무너뜨리는 그림을 머릿속에 굵게 그렸다.


보병은 그 그림의 배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기병이 들이치고,

보병이 모루처럼 버티면,

창수들이 틈으로 들어오는 적을 갈라야 했다.


하지만 평야의 현실은 그의 그림을 헝클었다.

논은 아랑(畦)마다 끊겼고,

갈대는 시야를 가렸고,

물러설 때마다 신발이 질컥거렸다.


모루가 설 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모루로 버틸 땅도 부드러웠다.

보병은 전열의 한복판에서

점점 병풍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장수 몇이 “보병을 산자락으로 붙여,

삼각으로 버티자”고 다시 청했으나,

신립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다.”


신립이 말끝으로 들판을 가리켰다.


“말이 달릴 것이고, 적의 중심을 뚫을 것이다.

좌·우·중 삼진으로 벌려 섬멸한다.”


김여물은 입술을 눌렀다.


“대감, 논두렁이 질고,

강변은 갈대가 우거져 말의 발이—”


“발을 올리면 된다.”


신립의 대답은 짧았다.


“진은 이미 정해졌다.

군심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다.

북을 올리고, 기를 세워라.”


점심 빛이 들판 위로 번지기 시작할 즈음,

달천 너머 단월역 쪽에서 먼지 기둥이 일었다.


월강 북단의 길목—

그곳으로 고니시의 중앙이 모습을 드러냈다.

행군의 피로를 숨긴 정연한 진열이었다.


좌측 강변으로 소 요시토시의 깃발이 늘어섰고,

우측 산기슭에는 마쓰우라의 기치가 바람을 읽고 있었다.

별동대의 깃발이 중간에 한 번 더 흔들렸다.


경계의 북소리가 먼저 달려왔다.

둔탁하고 일정했다.


신립의 군막에도 북이 울렸다.

기(旗)가 떠오르고, 말안장이 조여졌다.

기병의 고삐가 당겨질 때마다,

말들이 앞발로 진창을 휘저었다.


물줄기가 흙빛으로 튀었다.

말의 콧김이 흥건했다.


“좌군, 강가로 내려 깃발을 넓혀라.

우군, 구릉의 자락을 따라 전열을 잡아라. 중군—”


신립이 칼자루를 더 꽉 쥐었다.


“북을 세 배로 울려라.”


갈대밭이 바람을 받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들판의 공기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단지 무거웠다.


적의 조총수들이 어디쯤 자리 잡았는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있을 자리

—널찍한 논 가장자리, 물가의 낮은 둔덕, 산자락의 그늘—은

이미 들판 위에 음영처럼 찍혀 있었다.


장막 뒤, 누군가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섬멸이라….”


첫 신호가 강 건너에서 올라왔다.

아주 짧은 피리 소리였다.

이어서 북.


신립은 말머리를 들판으로 틀었다.


“전진.”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멀리 갔다.


북이 다시 울렸다.

말이 한 발을 내딛었다.

진창이 ‘푹’ 하고, 아주 깊게, 눌렸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들판 위의 모든 것

—갈대, 논두렁, 말발굽, 북,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순간만을 향해 모여든 것처럼,

서로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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