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5일, 동래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5일, 동래
초봄 끝자락의 바람이 아직 차가웠다.
동래성의 새벽 공기는 싸늘했고,
성벽의 돌은 밤새 머금은 냉기를 내뿜었다.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래처럼 한 줌씩 사라진 뒤였다.
골목마다 빈 상자와 뒤집힌 말안장이 나뒹굴고,
술지게미 냄새가 갑자기 끊겼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루에 내려다보며 짧게 명했다.
“나무를 더 베어 오라.”
성 바깥 고갯마루까지 소나무가 들어왔다.
성벽 아래에는 마름쇠가 깔렸다.
병사들은 활시위를 삶아 다시 매고,
소녀들은 깃발의 해진 가장자리를 꿰맸다.
성 위에는 목책이 한 줄 더 올라갔다.
나무가 우거지면 기병이 힘을 못 쓰고,
마름쇠는 사다리의 발통을 흔들리게 하리라
—계산은 분명했다.
준비하는 손들을 사뭇 침착했지만,
어쩔 수 없는 예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늘게 만들었다.
두어 밤이 지나는 사이,
부산진과 다대포에서 패전의 소식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송상현은 사람을 점검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성 뒤편으로 별동대를 붙여
포위가 완성될 때를 막기로 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성에 남았고,
양산군수 조영규는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이유로
잠시 성을 떠났다.
남은 자와 떠난 자의 발걸음이
성 둘레의 흙길에 따로따로 자국을 남겼다.
1592년 4월 15일,
오전 해가 비늘처럼 오르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이
동래성 동쪽 황령산 기슭에 달라붙었고,
또 한 부대는 서쪽, 또 한 부대는 남쪽에 자리를 굳혔다.
성은 세 면으로 조여들었다.
말고삐 소리와 장창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얇게 깔렸고,
돌 위의 음영이 점점 짙어졌다.
전투의 북소리가 시작되기 전,
나무 편 하나가 성문 앞으로 나왔다.
거칠게 다듬은 판자에 먹글씨 몇 줄..
“무모한 전투는 피하라.
나는 협상을 위해 도성으로 가야 한다..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어라.”
송상현은 성루에서 내려와 직접 붓을 들었다.
글씨는 곧았고, 획은 무겁게 종이에 박혔다.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바람이 잠깐 멎었다.
그 짧은 정적 뒤로 북이 울렸다.
왜군은 허깨비를 세워 궁수의 눈을 빼앗고,
사다리를 물결처럼 세워 올렸다.
조총이 센 불꽃을 토했고,
조선군의 화살이 목책 사이를 가르며 날았다.
성 밖의 나무들 사이로 사다리가 비틀거렸지만,
줄지어 올라오는 손과 발은 끊기지 않았다.
성 안에서는 손이 모자랐다.
남정네는 창을, 노인은 기와를, 아이들을 화살을 나르고,
아녀자들은 지붕에서 기왓장을 깨 내렸다.
목책 틈으로 화살을 다시 뽑아 올려 쏘는 손목들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성벽 아래 허수아비 넷이 쓰러지자,
그 틈으로 진짜 갑옷이 드러났다.
해가 중천으로 기어오를 때,
이윽고 성문 중 가장 취약한 동문 쪽이 흔들렸다.
성 위에서 기왓장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녀자들이 기와를 깨 쥐고 던졌다.
아이가 화살통을 물어 오고,
노인이 횃불을 들었다. 성 안이 심장처럼 뛰었다.
밀양부사 박진과 경주판관 박의장은
군사를 이끌고 가까운 고개까지 왔으나,
이미 포위의 원이 닫혀 더 들어오지 못했다.
멀리서 북을 울렸지만,
그 소리는 성 안의 혼잡을 더 조급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각의 별동대는
일본군의 바깥 원을 긁으며 들이치려 했다.
성 안에서 활시위를 당기던 손들이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었으나, 느꼈다
—멀리서 들려오던 북소리가 점점 얇아지는 것을.
동문의 기둥이 견디지 못하고 우지끈 소리를 냈다.
문짝이 안으로 휘어지며 틈이 벌어졌다.
왜군의 선두가 비집고 들어왔다.
골목은 금세 목이 졸렸다.
조총과 화약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뒤이어 몰려드는 칼날이 서걱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통과했다.
송상현은 성루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어떤 기록은 이때 그가 성루에 올라
왜장을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웃의 법도가 이러하냐!
우리가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거늘—”
또 다른 기록은 활을 들어 적 하나를 쓰러뜨리고,
검을 들고 뛰어들어 둘을 벤 뒤
장렬히 쓰러졌다고 적었다.
어느 쪽이든 그의 마지막은 말과 칼, 피로 새겨졌다.
성 안의 골목마다 작은 전장이 생겨났다.
관군 송봉수와 김희수는 끝까지 버티다 쓰러졌고,
향리 대송백·소송백, 관노 철수와 매동도
창끝을 놓지 않았다.
김상이라는 동래 백성은
옆집 아낙 둘이 깨 주는 기와를 받아
적병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나중에 어머니가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김상과 두 아낙은 적병 셋과 함께
한데 포개져 있었다 했다.
송상현의 애첩 금섬은
담을 넘어 전장을 뒤따르다 사로잡혔는데
사흘을 욕하고 발광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소실 이 씨는
끌려가던 배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름들은 짧았고, 죽음은 길었다.
해가 기울며 그림자가 길어지자,
왜군의 칼끝은 더더욱 망설임이 없었다.
전국시대의 공성 법도
—전투 전 항복이면 살려 둔다,
전투 중 항복이면 윗사람만 죽인다,
끝까지 항전하면 모두 죽인다—가
국경을 넘자 더 냉엄해졌다.
끝까지 버틴 성의 저녁노을이 핏빛에 흩어졌다.
성문 앞 해자가 시신으로 차곡히 차올랐다.
해자의 흙이 금세 불거졌다.
삽날에 닿는 뼈의 감촉이
군졸의 손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온갖 역한 바람이 일며 산자락을 넘어 번져나갔다.
화약 냄새와 피, 젖은 비단과 탄 나무 냄새가
바람결에 남아 해안으로도 흘렀다.
바다는 멀리서도 성이 무너지는 소리를 오래 되새겼다.
나무판 위의 문장들은 역사책의 활자로 옮겨졌지만,
그날의 호흡과 박동은 아직도 그곳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