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부산진성 조선 진영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부산진성 조선 진영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북측 흉벽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흉벽 꼭대기부터 돌무더기가 눈덩이처럼 흩어지고,
그 틈으로 검은 투구의 이마가 먼저 솟았다.
“머리! 왼쪽!”
창끝이 내려 찍히자
첫머리는 미끄러져 떨어졌으나,
바로 옆에서 두 번째, 세 번째 투구가 철컥거리며
무너진 흉벽을 타고 올랐다.
돌 틈으로 왜군의 창과 방패,
긴 칼이 성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깃발수의 팔이 떨리자,
박차고 올라온 정발이 깃대를 붙들어 올렸다.
“높이 들어라.
병사들이 보는 건 하늘이 아니라 저 깃이다.”
젖은 갑옷과 돌가루가 그의 어깨를 눌렀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칼날처럼 곧았다.
“좌익 두 줄, 반 보 뒤로!
창은 넓히지 말고—찌르고 빼라!
흉벽 모서리는 사람으로 메운다!”
그 말에 창끝들이 같은 호흡으로 들썩였고,
검은 투구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궁수 둘이 마지막 화살을 나누어 쏘며 틈을 봉합했다.
짧은 환희가 성 위를 잠깐 스쳐갔다.
“치익”—
고지 위 도화선의 숨이 길어졌다.
“쾅! 쾅!”
내리 꽂히는 납탄이 비질하듯 쓸고 지나가며,
깃발 아래 돌가루가 새하얗게 터졌다.
깃발수가 본능적으로 깃대를 한 뼘 더 들어 올렸다.
정발이 그 모습을 흘끗 확인하고,
오른손을 들어 신호를 주려는 찰나—
“퍽!”
둔탁한 충격이 그의 가슴을 안쪽에서 밀어냈다.
“억!”
숨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가까운 병사들이 그를 지탱하려던 그 순간
두 번째 탄환이 어깨너머를 비집고 지나갔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정발은 깃을 한 번 더 올려 본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깃발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꼿꼿이 섰다.
지휘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용맹은 섬처럼 흩어졌다.
창끝은 표적을 잃고,
방패는 서로의 발을 묶었다.
그 짧은 머뭇거림 사이로,
왜군의 방패 모서리가 가슴을 밀고,
긴 칼이 창과 팔 사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창을 내밀던 병사의 손목이 꺾이고,
그가 잡았던 창대가 돌 위를 긁으며 미끄러졌다.
깃발수는 피칠갑이 된 손으로 깃대를 끌어올렸다.
팔에 남은 힘이 부들부들 떨렸어도,
깃은 다시 똑바로 섰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아닌 돌가루가 맺혀 있었다.
코와 입에서 화약 냄새가 줄곧 올라왔다.
“뒤를 보지 마—”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바로 아래에서 방패의 모서리가 무릎을 쳤고,
옆에서 튀어든 칼등이 깃대에 쾅 하고 부딪혔다.
깃대가 부르르 떨며 그의 손에서 절반쯤 미끄러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다시 끌어안았다.
순간 차가운 쇳조각이 그의 목덜미에 파고들며,
솟았던 붉은 천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천은 돌가루와 피에 젖어 더 짙어져 갔다.
성 내에 검붉은 불길이 박차고 솟았다.
어느 사이, 전화(電火)는 흉벽 위를 넘어 성 전체로 덮쳐갔다.
뒤에서 울음 같은 소리가 밀려왔다.
굽은 등이 흔들리고,
치마 자락이 연기 속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이 땅에 머리를 박고 기어 나오다가,
수레바퀴에 옷자락이 걸려 휘청거렸다.
누군가의 이름이 한 번, 두 번, 세 번 불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울음은 머지않아 목이 쉬어 소리가 되지 못하고 없어져 갔다.
해가 한 뼘 더 올라선 뒤에야,
성루 위로 새로운 깃발이 완전히 솟았다.
부산진은 넘어갔다.
바다는 여전히 파도를 보냈고,
그 파도는 이제 상륙선과 보급선을 위한 호흡처럼 보였다.
전진은 지연되었으되, 멈추지 않았다.
성 위에 남아 있던 조선의 깃은,
돌가루와 피에 젖은 채
조각으로 갈라져 바람에 천천히 몸을 말렸다.
고니시는 마지막으로 성루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장수의 윤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주 짧게 성호를 그었다.
“끝까지였다.”
그는 뒤로 돌아서며 담담히 말했다.
“여기를 거점으로 삼는다.
병력을 두 줄로 나눠 정리하고, 상륙과 보급선을 연장해라.
다음은 동래다.”
바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같은 박자로 계속 해안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 물결은 이제 어제의 그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 성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