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당시 필자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그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을 올랐다. 천왕봉의 높이는 해발 1915미터.
그때는 확실히 철딱서니가 없었다. 높은 천왕봉의 해발만큼이나 '뻘짓거리'를 수없이 해댔었다. 등산로에서 담배를 피기도 했고, 꽁초도 아무데나 버렸다. 쓰레기도 버렸다. 지금이면 상상도 못할 짓을 버젓이 하고 만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들을 해서 그랬나? 지리산 산신령님이 노하셨는지 이후 내 삶이 좀 꼬이는 느낌이었다. 역사트레킹 강사라는, 이후 산을 작업장으로 이용하는 직업을 가지게 됐으니 그런 '뻘짓거리'는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직업을 떠나서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지리산은 몇번 올랐다. 고물자전거를 끌고 성삼재를 두 번이나 올랐고 청학동과 가까운 삼신봉에 오르기도 했었다. 특히 처음 자전거를 끌고 성삼재에 갔을 때는 태풍까지 만났었다. 당시 필자의 자전거는 앞뒤 브레이크가 둘 다 고장 난 상태였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상태로 구불구불한 지리산 관통도로를, 그것도 폭우로 젖어 있는 도로를 내려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후에도 꼬인 실타래는 잘 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죄를 짓지 말았어야 했다.
* 지리산 법계사
그런 의미로 이번 지리산 여행의 테마는 화해였다. 아니면 용서구하기... 그렇게 20년 만에 다시 천왕봉을 올랐다. 시작점은 경남 산청군 중산리였다. 20년 전에는 경남 함양군 쪽에서 올라간 거 같다. 왕복 약 11km 정도였는데 구체적인 코스는 이렇다.
중산리탐방안내소 -> 중산리계곡 -> 로타리대피소 -> 법계사 -> 천왕봉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천왕봉에 오르는데 무척 힘들었다. 분명 20년 전에는 힘들었어도 거뜬하게 올랐던 거 같은데... 그때는 어디서 줏은 냄새나는 침낭을 덮고 천왕봉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호기롭게 천왕봉의 기를 느끼겠다며. 그 다음날에는 세석평전쪽으로 이동을 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천왕봉은 동쪽에 위치해 있고 성삼재는 서쪽에 있다. 성삼재에는 구례군 읍내까지 군내버스가 다니는터라 '천왕봉~성삼재'로 지리산 종주를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산할 때는 편하게 버스를 타고 내려갈 수 있으니까.
통상적으로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의 왕복 코스는 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좀 느릿하게 가면 약 9시간. 하지만 필자는 10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사진도 찍고 놀기도 많이 놀았기 때문이다. 또 중간에 비가 와서 우비를 뒤집어 쓰고 걷느라 확실히 걸음이 느려졌다.
중간에 천년고찰 법계사에 들렸다.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창건을 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우리나라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00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만만치 않은터라 쉽게 갈 수 있는 사찰이 아닌 것이다. 한편 544년에 창건됐다고 하니 지리산에 있는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듯싶다.
산의 경사면 위에 지어진 사찰이라 그런지 법계사 경내는 다랭이논 같이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그 층위의 가장 높은 곳을 가면 큰 바위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473호로 지정되어 있는 '산청 법계사 삼층석탑'이다.
* 지리산 법계사: 법계사 삼층석탑
* 산청 법계사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큰 암반 위에 탑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자연암반이 탑의 기단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렇게 자연석 위에 석탑을 올린 형식은 신라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법계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니 신라시대 형식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신라의 탑들과는 달리 법계사 탑은 기단부를 더 과감히 생략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커다란 맹수들이 큰 바위에 올라 크게 울부짖듯이 삼층석탑도 거대한 암반 위에서 세상을 호령하는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큰 바위 위에 올려진 삼층석탑과 주위의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은 정말 절경이었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이런 아름다운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돌길과의 전쟁이었다.
지리산 산신령님께 용서를 구한다고, 아니 착한 일을 한다고 탐방로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줏었다. 쓰레기를 줍줍하니까 탐방 시간이 확실히 길어졌다. 무거운 배낭에 흰색 비닐 봉지를 덜렁덜렁 매달고 착한 일 좀 해봤다.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쳐다보더라. 그런데 그렇게 쓰레기를 줍줍하는 사람이 필자만이 아니었다. 어떤 젊은 친구는 줍줍을 하면서도 빠르게 이동을 하더라. 줍줍도 하고 등산도 빠르게 하고! 대단해보이더군!
산신령님이 용서를 해주셨는지 지리산에서 무지개를 보았다. 그리고 쉽게 보기 어렵다는 천왕봉 운무도 보았다. 중간에 소나기를 만났는데 비가 그치니 맑은하늘과 무지개, 그리고 양때같은 흰 구름무늬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다니! 산행에서 오는 피로가 싹 다 날라가는 느낌이었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 산행은 오후 7시경이 되서야 끝이 났다. 탐방로가 비에 젖어 엉덩방아를 몇 번 찧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탈하게 잘 마무리했다. 쓰레기도 잘 처리했다.
힘들었지만 무언가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 든 산행이었다. 지리산의 좋은 기운도 팍팍받아서 너무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