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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치하늬커 Jan 29. 2023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메일 한 통이 내 마음을 바꿨다

'포기'를 고민하는 삶을 응원하며

매년 초가 되면 일적으로 백지상태가 된다. 원래 회사들은 연말이 되기도 전에 다음 해의 계획을 세우고, 목표와 달성을 점검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 계획이 없이 새해를 맞이하게 된 지 꽤 됐다. 그건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른다’, ‘내가 이곳에 언제까지 살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면 한 해 계획이 다 세워져있으니 참 희한한 일이다. 디지털 노마드로, 비영리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6년째다.


설 연휴에 한 이메일을 받았다. "청소년이 목소리 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친구가 (2021년부터는 1인 기업으로 운영하고 있는) 유쓰망고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활동을 꾸준히 해 온 친구가 이메일도 아주 공손하고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보냈다.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응원의 마음으로 <거까그까> 책도 주문했다는 추신까지 달아서! 퍼스널 터치로 이메일을 마무리하는 이 친구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에 답장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올 초에도 ‘나 혼자 일하는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강의 들어오는 만큼만 하자’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있었다. 하고는 싶은데 계속 스스로 한계를 짓고 있었달까. 그런데 이렇게 선물처럼 뜻밖의 이메일을 받고 다시 ‘꿈’을 꾸고 있는 요즘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같이 해 볼 수 있을까 대화를 나누는데 내가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화면 앞에 마주한 이 친구의 존재가 내가 왜 이 일을 지속하고 싶은지에 대한 답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읽게 된 한 임상심리학자의 책 <맺힌 말들>이 있다. ‘포기하다’라는 말에 대한 챕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러니 포기는 할 수 없이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신중하게 내리는 결정이어야 한다.
내가 가진 것 중 어떤 것을 골라내서
인제 그만 버릴지를 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어야 하고,
여태 품고 있던 꿈이라는 이름의 어떤 뜻을
깊이 들여다보기로 마음먹는 용감한 결정이어야 한다. (52쪽) 


어쩌면 그동안 나는 계속 새로운 도전과 목표를 설정하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왜 이 일을 여기서까지 하고 싶은가’에 대해 자문자답했던 것 같다. 매년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포기’라는 말을 입 밖에 나오기 직전까지 매달아 놓았지만, 그 말을 뱉기 싫어서 계속 씨름했달까. 그게 결국 나를 지금까지 씨름판에 남아있게 했다. 


상황만 따지면 불가능한 일이 신기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 ‘우먼스베이스캠프(WBC)’ 도 있다. 작년에 한국에 있으면서 상상만 하던 리트릿 캠프를 두 명의 친구들과 실제 개최했다. 총 18명의 여자들이 모여 배를 타고 덕적도로 백패킹을 갔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대놓고 모집 홍보를 할 수가 없어서 전략을 바꿨었다. 주변에 아웃도어를 좋아하고 우리의 가치에 공감할 만한 사람들을 ‘커뮤니티 빌더’로 초대하는 형식으로. 오히려 정말 찐들이 모여서 모험, 여성, 야성의 키워드로 찐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태풍 때문에 갇혀서 1박2일이 3박4일 여행이 된 게 한몫 하기도 했지만.


너무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되니 운영진 셋의 마음속에 이걸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리고 싶다!는 열정의 꽃이 피었다. 그래서 신년 맞이 콜을 하다가 우리도 지치지 않고 계속하려면 지속 가능해야 한다, 곧 일정 정도의 수익이 나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WBC 멤버십 제도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시차 때문에 세 명이 접속한 도시의 햇빛 색깔이 다 다르다.

재밌는 건 코시국에 운영진 세 명이 다 한국에 없었다는 거다. 나는 미국 LA에, 지영이는 태국 방콕에, 명해는 탄자니아 잔지바르에 있었다. 지영이는 추운 겨울을 못 견뎌서 따뜻한 나라에서 항상 자체 겨울방학을 보내곤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못 가다가 드디어 갔다. 명해는 세계여행이 버킷리스트여서 여행 비용을 모았는데, 더 이상 늦어지면 왠지 못 나갈 것 같아서 남편은 한국에 두고 혼자 여행길에 떠났다.


어느 날은 셋 중에 둘이 해외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데 WBC를 운영한다고 매일 같이 카톡방에 대화가 쌓여가는 이 상황이 정말 징하다고 웃어젖혔다 (어머 WBC도 셋... 그렇게까지?). 덕분에 멤버십 제도는 진화해서 우리가 직접 프로그램을 다 운영하기보다는 아웃도어 밋업을 리드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커뮤니티 안에서 찾는 방식이 되었다. 일반 멤버십은 '와일드우먼'이라는 이름을, 리딩하는 사람은 '루트파인더'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결국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건 그 마음인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한다’는 말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있으니까. 굳건한 의지로 불도저가 되겠다기보다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 혹은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움켜쥔 채 신중하게 내 마음을 살피며 한 발 한 발 내디뎌 보는 용기를 갖겠다는 거다. 결정을 내릴 순간까지.


<맺힌 말들>의 ‘포기하다’ 챕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꿈을 목적어로 하는 문장을 ‘포기한다’,
즉 내던져버리고 그만둔다는 서술어로 마치는 사람의 마음은
아마도 무엇을 결정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고단할 상태일 것이다.
그렇게나 지쳐 있을 땐 ‘포기’라는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기로 한다.



'포기'를 고민하는 삶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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