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우미야오가 내 책상 위에 철퍽 앉을 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3월의 오후, 창밖의 볕이 참 좋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 유명한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으니까. 전염병에 걸리다니. 쓰면서도 새삼스럽다. 꼭 영화 속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소름 돋게 와닿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시작으로 남편과 나까지 확진되었다. 아이가 열이 났던 3일은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리고서 3일은 내가 고열과 근육통, 인후통 각종 증상에 시달리느라 누워만 있었다. 덕분에 새해 이후 다부지게 마음먹고 착실히 쌓아온 결심과 루틴이 처참히 무너졌다. 열심히 지켜온 개인 작업 시간도 정지, 배달 음식은 최소화하겠다는 결심도 끝. 몇 년간의 결심이 쌓여 간신히 시작한 테니스와 달리기도 멈춤, 어린이집에 간신히 적응했던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기도 리셋. 열흘 정도 집 안에 갇혀서 각종 고통과 정지를 겪는 중이다.
하지만 그동안 살면서 각종 이유로 여러 번 멈춰 본 역사가 있기에, 그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이 정도의 정지 상태가 불안하진 않다. 그동안 공들여 쌓은 리듬을 놓치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작의 기회는 또 있으니까. 잠깐의 예열 뒤에 또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자고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내 속도로 해나가고 싶은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그중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건 그림책 작업이다. 퇴사 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결심에는 잡고 싶은 두 마리 토끼가 다 있었다. 하나는 글을 쓰는 작가, 다른 하나는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여정은 매거진에 글을 기고하고 책도 쓰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기분인데, 그림책은 첫 작품을 붙들고 오래도록 지지부진하는 중이다.
그림책을 좋아한 건 열아홉 살 때부터였다. 그림책이 처음 내게 다가왔던 날의 장면은 인생의 여러 장면 중 많이 아끼는 장면이다. 남들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을 어쩜 그렇게 잘 아는지 다들 본인의 방향을 향해 성큼 나아가는 것 같은데 혼자만 방향을 잃고 멈춰있는 것 같아 답답한 열아홉 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아홉 살에 인생의 방향을 안다는 건 무척이나 희귀한 일인데 말이다. 그렇게 불안함으로 속 시끄러운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는 고요한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렸다. 책을 읽으러 가는 건 아니었고, 기숙사 학교에 다녀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도서관 책장을 동굴 삼아 피신 가는 거였다.
그날도 도서관으로 도망을 왔다가 제일 끝 책장에 꽂혀있던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라는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었다. 내가 스스로 그림책을 골라서 펼친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속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글이 빽빽한 책을 읽는 게 왠지 더 멋있어 보여서 일찌감치 글자 가득한 책만 골랐었다. 아무래도 내가 얼굴 빨개지는 쪽으로는 자신 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라는 책 제목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홀린 듯 책을 뽑아 든 것 같다.
펼쳐보니 글자가 많지 않은 그림책이라 그 자리에 서서 한숨에 읽었다. 다 읽고는 예상치 못하게 좋아서 한동안 책을 안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좋아하는 게 뭔지 몰랐던 열아홉 살이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감각을 제대로 느낀 날이었다. 일상의 기본 모드가 잔뜩 힘주고 애쓰는 상태인 편인데 그림책을 만난 순간만큼은 애쓴 것 하나 없었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다가 우연히 보물을 마주한 것 같았다.
아이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데, 쉬운 말과 그림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따스한 통찰을 주는 그림책이 매력적이었다. 빽빽한 서사와 어려운 묘사로 꽉 채워 압도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그림과 적은 글자가 주는 여백 사이에 독자의 상상과 해석이 자유롭게 넘나들도록 하는 점도 좋았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물론 있겠지만, 그 말을 완고하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히 건넨다고 느꼈다. 혹 독자가 다른 것을 느끼더라도 괜찮으니 마음껏 즐기라는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아 치밀하게 살고 있던 내게, 꼭 그렇게만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친절한 제안을 그림책에서 들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기 직전에 제대로 그림책에 반한 거다.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은커녕 좋아하는 색이 뭐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못 했던 열아홉 살이 이제는 서른세 살이 되었다. 이제는 좋아하는 게 없어 고민이었던 과거가 웃길 만큼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고민인 사람이 되었고. 그동안 세상이 변했고, 나도 변했지만, 그런데도 그림책만은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 쉽게 식거나 변하는 취향과 관점 속에서도 오랜 시간 꾸준히 좋아해 온 영역이 있다는 건 왠지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림책을 좋아하는 시간이 늘 행복했던 건 아니다. 그림책을 직접 쓰고 그리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모른 척하지 못하고, 일단 해보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그림책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만큼이나 괴로웠던 순간이 많다.
퇴사하고 낯선 땅 김천까지 이주 한 뒤, 이왕 이렇게 된 거 만들어보고 싶었던 그림책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 대책 없는 욕심을 부리는 걸까 싶어 끊임없이 날 무시하고 검열했던 날이 길다. 잘할 자신이 없는 걸 꾸역꾸역 하겠다고 붙들고 앉아 당장 버리고 싶은 무언가를 그려내는 시간은 미치도록 답답했다.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망했다 싶어 기가 죽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결정한 건 나인데 매일 회피하면서 그림책 작업을 미루기만 할 때는 스스로가 미치도록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괴로우면 꼭 그림책을 만들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이 길을 놓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붙들고 있었다.
슬펐다. 좋아하는 것을 간신히 찾았는데, 이제는 그걸로 괴로움을 느낀다는 게. 결국에는 좋아하는 걸 잃을 것만 같은 불안이 높아졌다. 이 괴로움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조급함에 여러 가지로 애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친구에게 마구 토로했다.
“분명 좋아해서 시작한 길인데 이렇게 괴로운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이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이면 이렇게까지 괴로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러다 그림책마저 싫어하게 될까 봐 겁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진짜 좋아하니까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하려는 거지.”
그 말이 내 마음속에 있는 거대한 명제를 부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즐거워야 한다.”라는 명제를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결벽을 차차 버렸다. 어쩌면 괴로움이 내가 이 일을 이토록 좋아한다는 걸 증명해 주는 훈장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즘은 괴로움을 내 작업 메이트 고양이라고도 생각한다. 괴로우미야오(지금 그냥 대충 지은 고양이 이름)는 내가 그림책 작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자꾸 내 도화지 위에 철퍽 앉는다. 그래서 하나도 그릴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괴로우미야오를 쓰다듬으며 '잘하고 싶구나. 그래서 괴롭구나.' 하고 멍을 때린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괴로우미야오는 조금씩 종이를 내어준다. 그 순간에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그린다.
좋아하는 일을 괴로워하면서 하는 일도 썩 나쁘지 않다.
아직도 첫 그림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 4년째 같은 책을 작업 중이다. 4년이라니. 4년 동안 매해 제일 첫 번째 새해 결심이 그림책 완성이었다. 괴로우미야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거다.
경제활동을 못 하는 지망생의 삶이 길어지자, 점점 더 초라하고 우울했다. 그래서 작년에는 일을 구하기도 하고, 들어오는 일을 있는 대로 다 하며 지냈다. 금액을 떠나서 내 노동으로 돈을 번다는 감각 자체가 주는 뿌듯함이 반가웠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이 얼마 없는 난 그림책 작업 시간을 포기해야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경제활동에 초점을 둔 일과 그림책 작업을 저울 위에 두고 고민했다. 어떤 걸 못 했을 때의 괴로움이 내게 더 큰지, 괴로움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그즈음 <거까그까>의 펴낸이 진저티 현선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잘하고 못하고 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거까그까>는 여러분 각자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더 선명히 알게 해 준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거까그까>를 쓰고 <거까그까>의 표지를 그리면서, 나는 나다움을 품고 있는 내 이야기와 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임을 뚜렷하게 알았다. 그러니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했던 일들을 '나다운 걸 표현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다시 가지치기했다. 그리고 그 끝에 그림책 작업이 선명히 보였다. 그림책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게 돈을 벌지 못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지금은.
하는 것도 괴롭고, 하지 않는 것도 괴로운 그림책 작업을 어떻게든 가져가려는 걸 보면 정말 이걸 하고 싶은 게 맞나보다. 그런 것치곤 너무 게을러서 의아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