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

미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반복된 선택에 대한 이야기

필자가 평소에도 항상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시간이다. 과연 시간은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관점으로 다가오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세상을 이해한다. 알고 있는 것도 보는 것도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가치관에 갇혀서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시간을 인식하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자시계로 계산되어 스마트폰에 나타나는 시간을 신뢰하는 세상에서 시간은 정말 정확한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늘 같은 방향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결과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가능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디즈니+의 드라마 그리드는 그 전제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이 작품에서 미래는 가능성이 아니다. 이미 한 번 지나간 시간이다. 태양풍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위기 속에서 정체불명의 인물 ‘유령’은 그리드라는 방어 시스템을 만들어 인류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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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정만 보면 단순한 SF처럼 보인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재난과 구조, 그리고 기술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이후에서 시작된다. 인류를 구했던 그 인물은 어느 순간 살인 사건의 공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쫓는 사람들과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얽히고설켜있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다. 그리드는 사건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시간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으며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얽혀 있고, 접혀 있고, 반복된다. 그래서 인물들은 선택을 한다기보다 이미 선택된 결과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 속에서 김새하는 구조를 이해하려는 인물이다.


시스템 안에서, 규칙 안에서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려 한다. 반면 정새벽은 현실을 추적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눈앞의 사건, 눈앞의 진실만을 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만 결국 같은 지점으로 수렴한다. 시간은 설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령’이 있다. 그는 인류를 구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범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물이다. 선과 악, 구원과 파괴가 동시에 존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묻는다. “인류를 살리는 선택은 언제나 옳은가” 우리는 보통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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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렸는가, 실패했는가로 보지만 그리드는 그보다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어떤 선택이 반복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속도감 있는 전개나 반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야기는 빠르게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보는 순간보다, 보고 난 뒤에 더 오래 남는다.


우리는 늘 미래를 바꾸려고 한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만약 그 선택조차 이미 한 번 지나간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리드는 미래를 막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는가와 아니면 선택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이 작품을 벗어나는 순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건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하루에 큰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선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미래’까지. 그리드는 말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지나간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드는 보통 도면을 그릴 때나 지구를 좌표로 나누어서 계산할 때도 활용이 된다. 인간의 우주여행은 우주방사선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몸을 통과하면 치명적인 DNA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구라는 행성이 가진 방어막으로 우리는 시간 속에 살아가며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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