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곽 vs 남포읍성
보령에는 역사와 관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지만 지역을 방어하던 곳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바다를 방어하던 충청수영성도 있지만 육지에서 방어를 하던 보령 성곽과 남포읍성이 있는데 현재 보령 성곽은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고 남포읍성은 충남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곳 모두 공통된 특징은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기록에 따르면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것은 고려 공양왕 2년 (1390) 진영을 추가한 남포읍성이 먼저 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겨울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한국에서 여행을 다니다가 보면 적지 않게 역사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데 관심이 없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다. 보령의 북쪽으로 가다 보면 관심 있게 지켜보면 보령 성곽으로 가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보령 성곽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 산성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것으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은 보령 관아문이다.
눈이 내리면 내리면 내리는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시간을 오롯이 버텨내며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보령 관아문은 보령현의 외곽에 쌓았던 보령 읍성의 남문 문루 건물로, 세종 13년(1431)에 현감 박효성이 지었다. 위에는 오픈되어 있어 누구나 올라가서 과거 지휘관이 서서 보았을 그 광경을 조금이나마 공유해볼 수 있다.
눈 내린 날 보령 성곽은 한 번쯤은 볼만한 풍광을 만들어 준다. 이 누각의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관아문의 현판에 친필로 쓴 이산해는 보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보령에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 선생이 있는데 이산해는 이지함의 조카로 명종 즉위년에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난 을사사화를 피해 이곳 보령에서 수년을 보냈다고 한다.
1432년에 제민당ㆍ공아 ㆍ병기고 등 140여 칸 규모의 건물을 지으면서 지역 거점 방어소 역할을 했던 이곳은 원래의 규모는 둘레 630여 m, 높이 3.5m였으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m와 북쪽 성벽 약 360m만이 남겨져 있다.
남포읍성에서 돌아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저수지로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옥동제를 지나면 보령향교가 나온다. 1723년(경종 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중등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868·1964·1967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5채의 부속건물이 있다.
앞서 본 보령 성곽은 보령의 마을과 어우러진 곳이라면 남포읍성은 규모가 서산 해미읍성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읍성의 고유 느낌이 살아 있는 곳이다. 주변의 민가들과 떨어져 있어서 마치 잘 보존되고 있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그 흔적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고 있다.
읍성(邑城)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으로 보령 성곽보다는 성곽이 더 길게 보존되고 있다. 보령 성곽과 남포읍성의 공통점이라면 산악지역이 많은 한국의 지형적인 특성상 보통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여 부정 원형(不整圓形)이 많은데 비해 비교적 평지에 만들어져 그리 고생하지 않아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령 성곽이나 남포읍성 모두 축조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서는 토성(土城 : 흙으로 쌓되 版築한 것)·토축성(흙으로 쌓되 削土 등의 방법으로 쌓은 성)·석축성(돌로 쌓은 것으로 自然割石築과 武砂石築이 있다)·벽돌성(벽돌로 쌓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전체를 벽돌로 쌓은 것은 없고 일부만 벽돌로 쌓았다.) 중 석축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무단 통치되고 나서 광복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의 그 피해를 복구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관계로 역사에 대한 연구는 늦게 시작되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의 성곽 연구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보령 성곽이나 남포읍성은 연해안의 외민족의 침입이 잦던 지역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진 고려 말·조선 초기로 방어선 정비와 행성 및 진보의 축조, 연해 지방 진보 축성과 같은 3가지 커다란 국가적 축성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관아로 사용되었던 건물들도 남아 있어서 그 시대 건축물의 양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 말고도 전국의 읍성으로는 동래읍성·해미읍성·비인읍성·남포읍성·홍주성·보령읍성·남원읍성·고창읍성(일명 모양성)·흥덕읍성·낙안읍성·진도읍성·경주읍성·진주읍성(일명 촉석성)·언양읍성·거제읍성·하동읍성등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3채의 관아 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현청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 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평지의 경우는 높은 망루와 축성에 따르는 많은 노동력과 배수 처리 문제 등 기술적인 여건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 축성은 지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성곽을 방어했던 지휘관들의 흔적들도 있다. 보통 평지에서 성만으로 방어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물을 이용한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성의 경우는 규봉(窺峯 : 넘겨다 보는 산)을 피하여 위에서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 선정을 하고 있지만 이곳은 실제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성을 방어하는 성벽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들이 꽤나 많다. 성문(城門)과 여장(女墻) 그리고 타첩(垛堞)·옹성(壅城 혹은 甕城)·곡성(曲城)·치성(雉城)·성우(城隅)·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 이 건설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추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 지역을 총괄하여 방어하는 병영성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갖출 수 있었다.
보령 성곽과 보령 읍성의 공통점은 또 있다. 안쪽에 향교가 하나씩 만들어져 있는데 앞에서 본 것처럼 보령 성곽의 안쪽에는 보령향교가 있고 남포읍성의 안쪽에는 남포 향교가 있다. 남포 향교는 조선 태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중수하고 1635년(인조 13)에 중창하였으며, 1720년(숙종 46) 웅천면 대창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975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교육은 어떤 위기에서라도 중단될 수 없다는 것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성곽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명사회가 시작되고 나서 교육은 개인적으로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사회가 제대로 동작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