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신 이의무 (李宜茂)
도지정 기념물 제185호인 이의무의 묘 및 신도비는 당진에 있는데 덕수 이씨 묘역이 자리 잡은 그곳에는 이의무의 묘를 비롯하여 30기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앞에는 이의무의 공적을 기려 중종 35년 (1540)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이의무는 세조 13년 (1467) 사마시를 거쳐 성종 8년 (147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소신대로 살다 간 사람이다. 아버지는 지온 양군사 이추(李抽)이며,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윤회(尹淮)의 딸이다.
이의무가 관직생활을 한 것이 30여 년인데 그동안 다양한 그의 행적이 이슈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493년 홍문관 응교로서 특명을 받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죽인 임실 현감 노처원(盧處元)을 엄히 국문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노처원의 동생 노처리(盧處利)가 음모를 꾸며 해하려 하자, 이 사실을 알고 노처리를 잡아 장형(杖刑)을 가하다가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기도 했다.
보통은 산에서 가장 보기 좋은 위치에 묘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의무의 묘는 산 아래에 마치 공원처럼 조성이 되어 있다. 풍수지리에서 일컬어온 명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능안으로 이 묘가 있는 도문리의 지명의 유래는 바로 과거에 급제하면 인생의 길이 열린다는 의미의 도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묘역의 건너편에는 이의무 선생의 호인 연헌을 따서 연헌재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너무 좋아서 능안은 왕릉으로 사용될 뻔하기도 했으나 이미 덕수 이씨 가문의 묘역으로 정해져 있어서 풍수 명사와 이해관계가 있었던 주봉공이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명사는 산의 형세가 북쪽으로 건해풍이 오고 해수가 보이는 대지 명당임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수목이 밀집해 있어 건해풍을 가린다고 고하여 왕릉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온 이의무는 무오사화로 평안도로 유배되기도 하고 홍주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관직생활을 30여 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재산이 많지 않은 청렴한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기품과 도량이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던 이의무는 학문을 중요시하며 살았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선한 마음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하늘이 준 벼슬이다.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면 공. 경. 대부 같은 벼슬을 받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주는 벼슬이다. 사람이 주는 벼슬을 얻고 나서는 하늘이 준 벼슬을 내팽개치는데, 그것은 바르지 않은 것으로 결국은 사람이 주는 벼슬조차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이는 요즘의 세태와 매우 닮아 있는 모습이다.
1510년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1516년 예조판서에 가증된 이의무는 청렴함을 추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맹자는 진정한 청렴함이란 세속을 부정하고 떠나서 산속에 근거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사람이 금수가 아닌 이상 사람들을 떠나서 어떤 이상도 추구하기는 힘들다. 이의무의 후손은 이곳을 상시 개방하는 공간으로 놔두면서 수려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이 공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믿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