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과 덕혜옹주의 비극

시대를 바꾸고 싶었던 최익현

진수 : 오늘은 수업이 하루 종일 꽉 차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이럴 땐 고기를 먹어줘야 하는데요. 소고기를 못 먹은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요. 한우의 그 육즙이 입안에서 맴도는 것 같습니다.

교수 : 진수도 한우를 좋아하는구나. 일본의 고베규도 괜찮긴 하지만 한국사람들에게 한우만큼 잘 맞는 육류도 드물지. 진수도 그럼 잘 알겠네. 한국에서 한우로 유명한 지역들 말이야.

진수 : 그럼요. 횡성한우, 광시한우, 안동한우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광시한우는 가깝기도 하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자주 가는 편이죠. 부모님이 좋아하세요.

교수 : 광시한우를 알고 있었구나. 그곳 한우는 질 좋은 암소를 현지에서 도축해 저온가공하기 때문에 맛이 좋기로 잘 알려져 있지. 그런데 다음에 갈 때는 한우만 먹지 말고 광시면 관음리에 있는 최익현 묘소를 한 번 들러봐.

진수 : 의병장이었다는 그 최익현이 그곳에 있었군요. 전혀 몰랐어요.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과 대치하다가 동족상잔을 할 수 없다하여 스스로 체포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요.

교수 : 묘소는 그곳에 있지만 그 분이 눈을 감은 곳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 대마도였어.


MG0A8091_resize.JPG 최익현의 제사를 지낸 수선사

진수 :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갔었나 보네요. 그럼 그곳에서 사형당한 건가요?

교수 : 아니 사형당한 것은 아니고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단식을 하다가 체력이 떨어지기도 했었고 풍토병과 겹쳐서 세상을 1907년 1월 1일 74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되지.

진수 : 그토록 일본이 싫었는데 그곳에서 장례를 치루었다면 혼이 잠들지도 못했겠어요.

교수 : 그건 아닐꺼야. 장례가 수선사에서 치러졌던 이유가 있는데 수선사는 백제에서 이주했던 법묘스님 (비구니)이 창건한 절이기 때문에 의미는 있었지.

진수 : 저도 얼핏 들은 기억이 나네요. 백제계 사람들이 대마도에 많이 정착을 했었고 일본 본토에 귀족세력중 상당수가 그들이라는 것이요.

교수 : 신라계도 있긴 했지만 백제계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리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주요세력중에 상당수는 백제계라고 보는 것이 맞아. 오늘의 주인공인 최익현은 이항로에게서 유학을 배웠으며 조선말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 맞서는 때에 위정척사론의 대표격 인물로 자리매김하지. 이후 그 강직한 성품덕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을 비판하였다가 사직하기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하자 재정이 부족한 조선의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이라고 시폐사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당하기도 했어.


MG0A8097_resize.JPG 1986년에 세워진 최익현 선생 순국비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

1. 경복궁 중건 등 토목 역사를 중지하고

2. 세금을 걷는 정치를 그만두며

3. 당백전을 혁파하고

4. 사대문세를 금지한다.

진수 : 교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성리학자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봤는데 대부분 융통성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당하게 합의하고 조율하면서 살아야지 모든 것이 원리원칙대로 된답니까.

교수 : 유학자들에게는 자신이 믿는 신념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듯 해. 이후에도 흥선 대원군의 지속된 섭정을 반대하며 계유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양도 가고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개항을 요구할 때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를 가기도 하지.

진수 : 사서 고생을 한 사람이군요. 그러다가 결국 의병을 일으켜서 인생의 마지막을 일본땅에서 보내구요. 그래도 그 의지만큼은 대단한 사람이네요.

교수 :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본 후 최익현은 최후의 수단인 의병을 일으킬 것을 선택하는데 이 때 올린 것이 바로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야. 의병항일전을 택하긴 했으나 불과 일주일만에 조선의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대치하다가 동포끼리 죽일 수 없다하여 결전을 포기해.

진수 : 그릇된 것을 넘어가지는 못하는 성격이었으나 첫 째도 백성, 둘 째도 백성, 셋 째도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드문 사람이었네요.



MG0A8113_resize.JPG 위에서 내려다본 수선사

교수 : 일본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던 최익현은 이후 대마도로 압송 구금되었고 알다시피 단식으로 항거하다 한 많은 인생의 마지막장을 덮었어.

진수 : 가봐야 할 곳이 또 생겼네요. 광시도 그렇지만 언제 기회되면 대마도도 한 번 가봐야겠어요. 그런데 수선사에 무슨 비석이 저렇게 많이 있나요? 저게 모두 묘지인가요?

교수 : 한국의 경우 묘지 공원이라던가 장례와 관련된 것은 모두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일본은 그냥 일반 주거공간 근처에 저렇게 묘지가 자리하고 있어. 산자와 죽은자가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조합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거와 어울리는 근거리에 모두 있거든. 그리고 한국은 1년에 추석, 설날, 제초하는 날을 정해서 멀리까지 가서 성묘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미즈무케라는 바가지가 달린 손잡이 물통에 깨끗한 물을 담아 가지고 저런 곳에 가서 묘비 및 석물에 바가지로 물을 얹어 끼얹는 것으로 성묘를 하지. 그런 걸 하카마이리라고 불러

진수 : 그거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한국은 전국토가 묘지강산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한데 말이에요.

교수 : 한국도 점점 바뀌고 있는데 언젠가는 묘지문화도 많이 바뀌지 않을까? 대마도에서 조선과 연상되는 사람은 최익현 뿐만이 아니라 덕혜옹주도 있어. 요즘 덕혜옹주와 관련된 뮤지컬도 많이 나오니까 익숙 할거야.

진수 : 비운의 주인공이죠. 조선의 마지막야황녀 덕혜옹주 이야기는 요즘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교수 : 대마도에 가면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가 있거든. 1912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에 끌려가 1931년 쓰미마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 백작과 강제 결혼을 했어.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원래의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되었으며 사진의 비는 2001년에 새로 복원된 것이야.

진수 : 조울증, 우울증, 치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덕혜옹주는 황실에서 태어난 것이 저주라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어요.

교수 :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끝까지 막아보려 했던 최익현과 빼앗긴 후에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는 5년의 차이로 동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었던 인물들이지.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MG0A8049_resize.JPG 덕혜옹주와 쓰시마 당주 백작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 봉축비


매거진의 이전글백제의 마지막 영웅 후백제 견훤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