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묘 : 두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
교수 : 오늘은 진수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야.
진수 : 예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가게가 있는데 그곳에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나가라고 하잖아요. 들어갈 때 권리금 준 것도 단골도 많이 만들어놨는데 말이에요.
교수 : 한국에서는 그런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해도 화가 날만해. 문제는 한국사회에만 있는 형성되어 있는 독특한 제도라는데에 있어. 보통 바닥, 영업, 시설로 나뉘어지는 권리금은 영업이나 시설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반면에 바닥 권리금은 무시하기 힘들지. 상권이 이미 형성된 곳으로 유동인구가 많기 때문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권리금을 주고라도 입점하려고 하는 거야. 상권은 건물주나 장사하는 사람 혼자서 형성한 것은 아닌데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또한 한국에만 있어.
진수 : 제가 이럴 때 힘만 있었더라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요.
교수 : 진수 말대로라면 재건축을 한다는 것인데 그건 '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이네. 그곳에서 영업을 하시고 권리금 회수도 하셨다면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진수 : 그곳에서 오래하시긴 했어요. 조금 옮겨서 하신다고 하더라도 단골들이 올거구요. 그런데 힘없어서 당하는 느낌 있잖아요. 그게 싫은거죠.
교수 : 그렇다면 어느 정도 힘이 있으면 괜찮겠어? 지인 중에 대통령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까?
진수 : 너무 많이 가신거 아니에요? 지인중에 대통령이 있어서 나쁠것이야 없지만...
교수 :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살았던 남자들이 있어. 찾아보면 많겠지만 아들을 진시황으로 만든 여불위가 있었고 조선 역사에서는 대원군 이하응이 아들을 고종으로 만들고 손자는 순종에까지 올렸으니 그 꿈을 이룬 셈이지.
진수 : 저도 대원군의 일화는 정말 많이 들어봤어요. 난봉꾼인척하고 다녔다는둥 조금 모자라고 실없는 사람으로 행동했다는등의 이야기가 많았죠.
교수 : 대원군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사람이야.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세도가들은 독약과도 같은 달콤한 권력의 단맛에 취해있었어. 조선이 어떻게 되든간에 자신의 달콤함을 채워줄 대상을 물색하고 있던 중에 대원군과 그의 아들이 눈에 띄인거지. 사실 대원군은 고종 즉위 17년 전인 1866년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지사인 정만인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묘자리를 '두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 [二代天子之地]' 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 이장을 결심한 거야. 야심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았다면 대원군이 딴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거야.
진수 : 그 지사의 말대로 두 대에 걸쳐 왕이 나왔으니 대원군의 꿈도 이룬거고 풍수지리의 예언도 맞은 셈이네요.
교수 : 그러면서도 권력을 손에 쥐고 조선을 좌지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서 긍정적인 것만 있었을까?
진수 : 아들이 왕이 되었고 죽기 전에 손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보았으니 여한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교수 : 대원군이 살아생전에는 을사조약, 한일합방 같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들인 고종의 의뭉스러운 죽음과 손자인 순종은 창덕궁에 유폐되다시피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손녀인 덕혜옹주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다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볼 수는 없지.
진수 : 듣고보니 그렇네요. 왕이 되면 뭐해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면 먼 소용이 있겠어요. 게다가 손녀딸이 그렇게 사는 것을 하늘에서 보았다면 참 가슴 아펐을거에요. 지금 뮤지컬로 보아도 가슴이 시린데.
교수 : 시대의 변화요구에 흥선대원군과 메이지 천황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어. 메이지 천황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특권층인 사무라이 제도를 무너트리면서 봉건적인 막부 체제를 무너트린 반면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들의 세력을 위축시키긴 했으나 봉건제 해체를 막아 위기를 극복하려 했어.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한 셈이지
진수 : 저도 중고등학교 때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일본은 처음 강제로 개항된 이후에 빠르게 적응한 반면 조선은 더욱더 문을 굳게 닫아 걸었으니까요. 산업혁명 이후에 발전된 그들의 기술을 이길 수가 없었던 거죠.
교수 : 어쨌든 흥선대원군 개인적으로만 본다면 꿈은 이룬거야. 그리고 권력십년이라는 말처럼 10여년의 집권기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해보기도 했으니까. 자주적 근대화를 할 수 있는 황금시기는 놓쳤어도 지나간 과거는 어찌할 수는 없지.
진수 : 그런데 진짜 남연군묘를 명당 자리에 이장했기에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보세요?
교수 : 앞서 말했던 토정 이지함을 언급하지 않아도 풍수지리는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비중이 작지는 않아. 흥선대원군의 남다른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가 계산한 것처럼 모두 맞아 들어가려면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운이라는 것이 따라줘야 하는데 그 운은 바로 명당의 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냥 명당에 조상의 묘가 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잘되지는 않지만 영향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야.
진수 : 그렇다면 500여년을 지속해온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명당자리에 묻혔을 듯 해요.
교수 : 맞아 조선의 왕은 사후에 모두 명당이라고 부르는 자리에 묻혔는데 대표적으로 건원릉(태조), 헌릉(태종), 영릉(세종), 건릉(정조), 남연군묘 정도를 거론하고 있어. 특이하게 좋은 명당 자리로 군으로는 남연군이 거의 유일할정도로 그 곳은 지세가 좋아.
진수 : 위치는 참 좋네요. 앞에는 확 틔여있고 좌우측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 풍수를 모르는 제가봐도 참 지세가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교수 : 풍수적으로 볼때 요체가 되는 장소인 혈은 시신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있어야 해. 남연군묘의 앞뜰인 내명당이나 아래로 내려와 비교적 넓은 가야사지자리의 외명당을 보면 넓고 평탄해. 좁고 경사지거나 비뚤어진 것도 없어.
진수 : 가야사지요? 그곳이 사찰이 있었다는 건가요?
교수 : 대원군이 그곳에 묘를 옮기기 위해 원래 있었던 가야사를 폐쇄하고 남연군 묘를 이장했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 발굴조사를 거쳐 가야사의 사명 및 사역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뿐만이 아니라 8동의 건물과 가람배치까지 확인했으니까.
진수 : 사찰까지 폐쇄하면서 옮길 정도의 명당이란 말이에요? 사찰에서 거주하던 승려들은 억울했겠어요.
교수 : 그래서 그런 전설도 내려와 가야사를 폐쇄하고 남연군 묘를 쓰자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던 상기리 미륵불이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지
진수 : 명당이 무엇인지 참 단순히 욕심으로 치부하기에도 그렇고 결국에는 후손들이 잘살기 위한 것인데 묘자리 때문에 다툼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씁쓸하네요.
교수 : 원래 명당이라는 의미는 후손들이 권력을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후손들이 평온하게 잘살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대원군은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옮길 때 상여를 극진하게 모신 광천리 마을에 줬다고 하는데 그 후로 마을 이름이 '남은들'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지.
진수 : 자신의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 왕에 오르는 것은 예상했을지 모르나 자신의 죽고 나라를 빼앗기고 20여년 후에 아들이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는 몰랐겠죠?
교수 : 당연히 절대 알지 못했을테지. 그러나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의미있는 것이 아니겠어.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돌은 자신이 던지고 그 결과 역시 자신이 책임지는 거니까. 흥선대원군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런 고사성어가 생각나네 비인부전부재승덕(非人不傳不才勝德)라는 의미 있는 말이야. 풀어 이야기하자면 "인격에 문제 있는 자에게 높은 벼슬이나 비장의 기술을 전수하지 말며, 따라서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아니 된다"
진수 : 교수님 말은 흥선대원군이 책임지지 못할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하는건가요?
교수 : 그건 알아서 해석하고 흥선대원군에게도 공과 과가 있는데 과가 공보다 조금 더 크지 않았나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아들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묘를 이장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고종이 즉위하고 불과 5년 후인 1868년 E.오페르트에 의해 남연군 묘가 도굴당하고 그로 인해 쇄국정책의 높은 장벽을 마음에 세웠으니까.
진수 : 모든 것이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네요. 남연군 묘를 이장한 작용이 있고 반작용으로 묘가 도굴 당했고 그걸 사건을 작용으로 강력한 쇄국정책이 실행되었으니까요. 마치 하인리히의 법칙같네요.
교수 : 한 번의 큰 재앙이 오기 전에 29번의 경고와 300번의 징후가 있다는 하인리히의 법칙과는 좀 다르지만 맥락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19세기 후반 수 십년간 수많은 징후와 경고가 있었을거야. 조선의 운명을 가를만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니까.
진수 : 후손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흥선대원군은 삶에 후회는 없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