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뜨거웠던 그날들

대륙으로 진출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우선 한반도부터 체계적으로 장악을 시작했다. 1904년 대제국이었던 러시아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하고 러시아에 이긴 힘을 과시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묵인을 이끌어 낸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며 국제사회에서 발언을 못하게 된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경제 침략은 가속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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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한민국의 예산은 447조로 그 속에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 할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약 110년 전인 1907년의 대한제국의 1년 예산은 1,300만 원 정도였는데 이 정도 규모의 돈이 국채로 일본에게 있었다. 필요하지도 않지만 경제 침략을 가속화하기 위해서 차관은 계속되었다. 어떤 국가의 화폐 기능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신뢰가 있는 화폐를 발행하던가 가치를 폭락시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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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를 빨리 실어 나를 수 있는 다양한 교통수단은 식민지화를 하는 데 있어서 필수인데 일본은 한반도에 철도부설을 앞당기려고 할 때 방해한 의병들이 있는데 이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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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개인이나 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잘 사용하지 못하면 무너트리는 독약이다. 아무런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돈은 없다. 그냥 그런 의도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러일전쟁 중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품의 조달을 위해 건설한 경부철도를 비롯하여 일제는 1905년 6월 재정 고문 메가타 주도로 200만원의 차관을 들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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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초대 통감 이토부미는 일본 흥업은행에서 무려 1,000만 원의 차관을 1906년에 들여오면서 대한제국은 경제적으로 일제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근래 화폐의 폐단이 고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 중략-

제일은행권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한 종이에 서명하고 죽음으로써 맹세한다."

- 공제소 명의 통문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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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일본에 갚아야 할 국채 1,300만 원은 당시 국교에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수준의 돈이었다. 당시 의식 있던 사람들은 그 돈을 갚지 못하면 결국 삼천리강토가 일제에 넘어갈 것을 알고 국채 보상운동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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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동성로, 서성로 등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가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처음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재산, 종교,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참여할 수 있었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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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에 발행된 대한자강회월보 9호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주장한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의 주장을 담은 '대구광문사 국채보상취지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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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의 중요성으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2천만 국민이 3개월 간 담배를 끊어 모든 돈으로 1,300만 원 나라 빚을 청산할 수 있다며 서상돈은 800원을 내놓았다. 담배를 의지에 의지에 의해 끊는 것을 보통 금연이라고 부르지만 무언가의 목적에 의해 끊는 것은 단연이라 한다. 생활 속의 실천을 통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당시 큰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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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우리 부인 동포에게 알리노라.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머물러 삼종지 의외에 간섭할 일이 없으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 경고 아 부인 동포라


들불처럼 퍼져나간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인돈은 약 200,000원이었다. 당시 은행 직원 1달치 월급은 20원 정도였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해 보면 약 80억 원에 이른다. 경제규모가 달랐으니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의미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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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조그마한 물건을 파는 장수부터 어린이, 노인, 부인, 백정까지 모두가 주인이 되어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해서 만든 국채보상운동은 자주 주권을 지키는데 실패하였지만 이 문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와 1997년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이나 나라의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 참여하는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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