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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5. 2018

면천읍성

면천면의 특별한 것들

면천면은 면천읍성을 비롯하여 면천향교와 면천에서 생산되는 면천두견주가 있는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다. 볼거리도 적지 않지만 한 번 이곳에 터를 잡고 산 사람들은 이곳이 좋아 평생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면천을 몇 번 찾아온 사람들은 귀향 대상지로 손꼽기도 하는 곳이다. 


면천면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는 장면은 꽤나 잘 만들어진 성곽으로 이어진 면천읍성이다. 다른 곳에도 읍성이 있지만 이곳 역시 다른 곳 못지않게 잘 보존되어 있고 지금도 옛 흔적 그대로 조금씩 복원되고 있어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다.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에 세워졌다고 하나 실은 백제 초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은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고 한다. 서해바다와 가까우면서 중국과 교역에 중심이었던 당진이기에 이곳은 조선을 비롯하여 고려, 백제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면천읍성을 보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면천면의 행정을 담당하는 면사무소가 있는데 그 앞에는 복원된 옛 관아 정문 누각인 풍락루가 있는데 풍락루는 무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날 충남의 다른 지역에서 온 담당 공무원이 면천읍성을 답사하고 있었는데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면천읍성이 잘 복원되어 있어 자신의 있는 곳의 읍성을 복원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며 나중에 복원이 되면 한 번 방문해주기를 요청했다. 

면천읍성은 1797년(정조 21년) 면천군수로 부임한 연암 박지원의 애민(愛民) 정신과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바탕으로 한 사회 실천성 사업인 여민동락 역사 누리 사업을 통해 많은 것이 바뀔 예정이다.  2018년 사업에 본격 착수, 2025년까지 8년 동안 190억여 원을 투입해 면천읍성의 동헌과 객사를 비롯해 애민관과 칠 사고 교육관을 건립된다고 한다. 

앞쪽에 성곽보다 뒤에 조성되어 있는 성곽길이 걷기에는 더 좋다. 누각도 있지만 성곽길 주변으로 탁 트인 느낌이 드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면천읍성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올해 초에 개관한 이곳은 구면천우체국 청사 자리에 우체국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층에는 전시공간과 2층에는 차를 마실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얼마전에 3월 1일로 삼일절이었는데 면천에서도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역사의 물결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 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도 새겨져 있다. 오! 자랑스러운 면천의 소리가 자유와 정의를 위한 수호천사로 이렇게 면천을 지켰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아직 온전히 겨울이 지나가지 않아서 언제 한 번은 꽃샘추위가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면천 군자정으로 군자지는 고려 공민왕 때 지군사 곽충룡이 읍성객사 옆에서 만든 연못으로 1800년대 후반에 나온 '면천읍지'에 계해년(1803)에 신축하였다고 되어 있다. 1803년 당시 면천군수 유한재가 피폐해진 군자지를 보수하면서 못 가운데 둥글게 섬을 만들어 위에 8각 정자를 짓고 못에 연꽃을 심어 고기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군자정을 보고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연못에 아주 소박한 정자가 하나 있고 주변으로 걸을 수 있게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면천면 청사는 옛 면천 군청의 동헌(東軒)이 있던 곳이기도 하며 면천은 고대 사회로부터 당진의 중심 고을로 통했던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혜군에 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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