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 못 미친 연출력
골든 슬럼버라는 소설을 읽은 것이 한 10년쯤 되었나? 나름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영화까지 일본스러웠다. 별로 한 것 없이 성실히 살았을 뿐 그 대가로 누군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을 치면서 친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 골든 슬럼버다. 우선 강동원의 연기는 무난한 수준이었지만 연출력이나 개연성에서 무척이나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혹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가 골든 슬럼버 인 듯하다.
소설이나 일본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직 총리가 암살당한 것과 유력 대선후보가 암살당한 정도의 차이지만 그 차이는 미묘하게 컸다. 그가 암살범으로 지목 받음으로써 오랜 친구인 ‘동규’(김대명), ‘금철’(김성균), ‘선영’(한효주)마저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이다.
뭐 강동원만 보아도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상관은 없겠지만 해맑은 남자의 도주극으로만 만족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음모가 있고 그것을 사람 좋은 것을 이유로 남아 있는 지인들로 극복한다는 설정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잘 안 맞는다. 친하면 친할수록 이득을 위해 뒤통수를 쳐주어야 속 시원한(?) 한국인들에게 친한 지인이라는 설정이 낯 간지러워진다. 그런 건 일본 사람들 스타일에 어울린다. 일본인이 더 사기를 덜 치고 더 인간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올 고통에 한 발자국 물러서는 우리들의 아쉬운 이면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음식점에서 비밀회동을 하던 한국 정치인들의 부끄러운 속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심지어 생각 따위는 없다고 외치면서 특정당을 찍어주는 사람들은 함께 살고픈 생각이 있을까. 골든 슬럼버의 건우처럼 한국사회는 힘없는 자에게 손을 잘 내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발 벗고 나서 줄 지인들도 없다. 비현실을 현실화하려다 보니 연출력에서 금이 가고 그러다 보니 억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착하기만 하고 건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도와주고 싶다는 설정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그런 사람이기에 암살범으로 몰아넣고 모든 상황극을 꾸민 국정원도 그렇지만 일부 세력의 음모와 함께 오랜 시간 그를 만나지 않았던 지인들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었다.
책장 한편에 꽂아 있던 원작 소설을 다시 읽게 만드는 영화의 마력에 깜짝 놀랐다. 치밀하다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오락소설로는 괜찮았던 골든 슬럼버는 무난한 스타일의 스토리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해. 사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라는 문구도 소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고 할라나...
이 시점에서 골든 슬럼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