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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6. 2018

역사 흔적

대청호 주변길

한밭이라고 불리는 곳은 현재 대전의 중심지이지만 예전에는 회덕과 진잠이 대전에서 사람이 살아가던 터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청호 주변과 송촌동 주변에 적지 않은 흔적들이 있다. 보통은 역사적 흔적은 지나치기 마련이라 관심에서 먼 경우가 많다. 대청호에서 대표적인 역사 흔적은 용호동 구석기 유적과 차윤주, 차윤도 정려각, 취백정을 꼽을 수 있다. 


금강과 용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지점에 있는 용호동 구석기 유적은 비교적 늦게 발견되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은 지금으로부터 10~4만 년 전 사이에 중기 구석기시대와 4~1만 년 사이의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전지역에는 둔산동의 선사유적지와 이곳의 유적지로 판단해보건대 이미 10만 년 전부터 구석기인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 많지는 않지만 동북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다양한 성격을 연구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고 지금은 발굴된 곳만 이렇게 펜스를 쳐서 보호를 하고 있다. 금강과 용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지점에 자리 잡은 용호동 구석기 유적은 4개의 문화층에 따라 석기의 제작기술과 구성 관계를 매우 특징 있게 나타내고 있다. 

구석기 유적을 보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차윤주, 차윤도 정려각이 나온다. 정려각은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다. 정절녀의 경우 열녀각이나 열녀문이 되고 효자의 경우 효자각이 되며 일반적으로 정려문이나 정려각으로 칭한다. 이렇게 현판과 비석을 세우고 각을 건립하여 그 의미를 기린다. 

조선시대에 정려각을 세운다는 것은 마을의 경사를 의미한다. 집안뿐만이 아니라 고을의 경사였던 정려각이 세워지면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는데 수령과 향교의 유학자들, 혹은 해당되는 집안에서 신청을 하면 예조에서 심사하여 왕에게 올리고, 최종적으로 왕이 정려를 명하면 세워지게 된다. 

벼슬을 내리거나 세금과 균역을 면제하기도 했던 정려각은 마을의 큰 경사였으니 대청호의 외곽에 세워진 이 정려각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회덕에는 은진 송씨의 많은 사람들이 흔적이 있는데 대청호의 중간 부근에 잇는 취백정은 송규렴 (1670 ~ 1709) 선생이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가르치던 터에 지어진 건물로 숙종 27년 (1701)에 처음 지어지고 그의 아들 송상기가 다시 지은 건물이다. 

안에는 건물 한동만이 있는데 건물의 대청마루 위에는 정조대왕의 어필 사호각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후에 없어졌다. 송규렴은 은진 송씨로 자는 도원, 호는 제월당이며 충청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80세 때 지돈녕부사에 올랐다고 한다.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어졌던 송규렴은 사후에 문희의 시호가 내려졌다. 

안의 공간은 여유 있고 조용했다. 대청호에 적지 않은 역사적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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