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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8. 2018

거제현 관아

거제 나들이

사람들은 거제도를 기억할 때 몽돌해변이라던가 해변가의 멋진 드라이브 코스길을 먼저 연상하는데 거제도는 남해 전진기지의 중심으로 방어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제현은 성이라던가 관아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현존하는 관아 건물인 기성관이 있는 거제현 관아는 우아한 고전미를 간직한 층단식으로 이중 지붕 팍작으로 고대위에 아름드리 원목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거제도의 ’ 거제’라는 이름 속에, 클 거(巨)와 건널 제(濟)로 '크게 건너다'라는 단순한 뜻이라고 볼 수 있으나 "濟"(건널 제)는 우리나라 고유어 "거리츄다", "거리치다", "구제하다", "거느리치다(물에서 건져내다)"라는 순우리말의 한자어라고 한다. 


거제도는 여러 번 와봤지만 필자 역시 거제현 관아를 찾아와 본 것은 처음이다.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이곳에는 방어를 위해 조라, 옥포, 가배, 장목 등 7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는데 건립 당시 거제현이 부로 승격되면서 거제도 인근 지역까지 행정, 군사를 책임지는 거제부 관아의 중심 건물이 바로 기성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제현 관아의 관리로 내려와서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은 보통 돌로 비를 만드는데 철로 만들어진 비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원래 거제시청이 있는 고현성 부근에 세워진 기성관은 임진왜란 때 고현성이 함락되면서 불타버린다. 임란과 호란이 끝난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경상남도 4대 누각으로 통영의 세병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이곳 기성관을 꼽는다. 

직접 와서 본 기성관의 규모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일반적인 객사 지붕의 형식으로 중앙은 맞배 형식으로 하여 약간 높게 한 뒤 양끝은 낮추어 팔작 형식으로 처리하였는데 건물의 중앙 부분을 높인 것은 왕을 상징하는 패를 모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곳이 객사로 쓰임새가 바뀐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선조 26)에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이 설치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사람들이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뒤에는 거제현 관아 질청이 있다. 질청은 지방 관청의 육방을 비롯한 하급 관리들이 사무실이나 서재로 이용했던 건물로 이 건물 역시 고현성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서 재 건립되었다. 육방 중 하나인 이방을 비롯한 육방관속(六房官屬)들이 부사의 명령을 받아 직무를 수행한 사무소로 거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부산지방법원 거제 등기소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등기소 역할을 하다가 1982년 등기소가 고현으로 옮기고 나서 1984년에야 비로소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건물을 오래되었으나 그 규모가 작지는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27칸이 넘는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거제의 멋진 경치를 대표하는 것은 바로 바다지만 그 중심으로 오면 거제 역사의 속살을 만날 수 있다. 학동해수욕장의 힘차게 밀려드는 파도가 옥돌을 감싸며 쓰다듬는 소리도 좋지만 오래된 흔적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거제현의 옛 지도를 보면 거제현의 관아인 동헌, 기성관, 질청, 관청, 내아, 공소(工所), 통인방, 형방소, 읍창, 단실, 수직소, 외삼문, 내삼문, 군관청, 관노방, 교방, 사령방, 군고방 등은 배산 구조와 안산, 관아배치와 진입로 구조가 시각적으로 뚜렷한 축을 형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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