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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9. 2018

반곡서원

유배지에 만들어진 배움터

거제도의 대표적인 배움터는 거제향교와 반곡서원이 있는데 반곡서원은 조선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유학자 송시열을 기리며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반곡은 넓고 깊은 골짜기라는 의미로 1689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중전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극렬 반대하다가 거제도로 유배된 우암 송시열을 모시기 위해 붙여진 서원의 이름이다. 


반곡서원이 우암의 유배터였던 거제면 동상리 367-3에 세워진 것은 1704년으로 송시열의 후학이었던 윤도원 등이 세우고 우암을 모셨다. 거제도에 유배되었던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다시 이배 되는데 제주도로 가서는 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83세에 제주도에 유배되어 생활하던 우암 송시열은 장희빈의 세력이었던 남인들이 다시 국문하도록 요청하여 한양으로 압송하던 도중 같은 해 6월 7일 정읍에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다. 

반곡서원은 말 그대로 우암 송시열의 혼백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어떻게 보면 사당과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거제로 유배를 와서 글을 읽고 도를 강론함으로써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기에 만들어졌다. 반곡서원 역시 대원군의 훼철령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863년 지역의 인사들이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사액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대원군의 서원 폐쇄의 마음은 굳어졌을 때였다. 

분위기가 꽤나 좋다. 반곡서원은 오픈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낮에는 시간에 맞춰 방문할 필요가 있다. 반곡서원 안에는 우암사, 동록당, 강당,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비각, 고직사, 협문, 죽천, 연못이 남아 있다. 중앙에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저 강당은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건물의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필자가 사는 곳에 잘 알려지지 않는 동네 대전의 회덕은 큰 덕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고장이라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협문으로 나아가면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이 있다. 거제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이 벼슬길에 나아가고 다시 낙향하기를 무려 28번이나 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시간동에 유배의 시절을 보내야 했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우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떤 왕보다 많이 이용돼ㅣ었는데 언급된 것이 무려 3,000여 번에 달한다. 

지금 이물을 마시지는 않겠지만 옛날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우암 송시열, 충헌공 김창집, 좌의정 이이명, 문청공 김진규 대제학, 신구 선생 등이 이 샘물을 마시고 생활했다고 한다. 이름하여 대나무가 있는 곳에 고인 물이라는 의미의 죽천이다. 


죽천 김진규 선생의 시


꽃을 보니 생각나네.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바다 멀리 봄빛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멀리 고향의 우리 집 담 북쪽 모퉁이 

내가 심은 몇 그루 나무도 꽃 피어났으리

반곡서원에서 소신 있는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행간을 읽어본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이슈를 만들었던 숙종대의 장희빈은 결국 우암 송시열이라는 대학자를 거제로 유배가게 만들었고 사사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 지금의 정치인이야 큰 실수나 유력 권력자의 눈에 벗어나면 실각하면 그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반곡서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서원으로 예스러운 멋을 간직한 곳이다. 간결하면서도 소신이 있는 우암 송시열의 인품이 잠들어 있는 느낌이다. 지켜야 할 소신은 지키지 않고 이득에 의해 소신을 버리는 오늘날의 정치사에 많은 가르침을 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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