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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3. 2018

사빈서원

경북 안동의 복원된 서원

사빈서원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 선생과 다섯 아들의 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숙종 36년(1710)에 사림과 후손들이 건립했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지만 지난 2011년에 143년 만에 복원된 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사빈서원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청계 김진의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이다. 


복원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썼는지 고증을 거쳐 웅장하게 복원이 되어 있다. 청계 선생의 6 부자를 모시고 있는 곳인데 특히 김성일은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고 하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일축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은 대군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올라간다. 선조는 이에 김성일을 벌주려고 했지만 유성룡의 간청에 의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후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사빈서원 옆에는 이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머무는 집이 있다. 1593년 김성일은 10월, 왜군이 호남 진공을 목표로 진주성에 몰려오자 김시민을 진주 목사로 임명하여 지휘체제를 일신하고 최경회·임계영 등이 이끄는 호남의병과 김면·정인홍·곽재우 등이 이끄는 경상 의병과 연합하여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승을  거두지만 2차 진주성 전투를 대비하다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진주성은 개 한 마리 남김없이 도륙을 당한다. 

자신의 당파를 위해 서원을 악용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원은 사림 활동의 구심체로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일정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 왔다. 즉 중앙의 정치 문제에 대해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거점으로 활용이 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퇴계 이황의 정신을 김성일 역시 이어받은 대학자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던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을 오판하게 만든 인물로만 기억되는 김성일은 출사 초기 예문관에서 복무할 때 노산군 복위와 사육신의 복작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야를 술렁이게 하기도 했다. 

사빈서원 같은 곳의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원생이 숙식하는 동·서재의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않고 적응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어,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건축구조의 특징이다. 강당인 흥교당(興敎堂)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상부는 5량 가구에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뒤쪽에는 사묘 공간이 있고 앞쪽에는 거주하던 공간이 있는데 좁은 문은 항시 열려 있어서 사빈서원을 언제든지 와서 볼 수 있다. 사빈서원에 들어서면 입구의 넓은 터와 함께 삼문 경원루(景遠樓) 좌측에 박학 독행(博學篤行: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자)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자녀 교육에 각별했던 청계 김진은 아들들을 잘 가르치려는 열의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퇴계는 일찍이 넷째 아들인 학봉을 "행실이 훌륭하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의 눈에 그를 견줄 이를 보지 못했노라"라고 평했다.

사빈서원이라는 곳은 수많이 잔존하고 있는 안동의 서원중 도산서원, 분강서원, 역동서원, 경광서원, 병산서원, 호계서원, 임천서원, 청성서원, 분강서원, 기양서원, 용강서원, 사빈서원, 도계서원, 묵계서원, 임호서원, 타양서원, 유암서원, 고산서원, 서산서원, 화천서원, 봉암서원, 창렬서원, 근성서원, 벽계서원중 한 곳이다. 한국 정신문화의 원류가 고고히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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