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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9. 2018

곤양향교

퇴계 이황의 향기

퇴계 이황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대유학자 중 한 명이다. 33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던 퇴계 이황은 지금의 사천 지방으로 여행에 나서게 되는데 1533년에 곤양 군수인 관포 어득강이 초대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려 30년이 넘게 차이나는 나이임 데도 불구하고 어득강은 퇴계 이황이라는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의 글재주와 덕망을 보고 싶었기에 직접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은 시대를 관통해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곤양은 현재 사천에 속해 있지만 옛날에는 곤양 군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안동에서 떠난 퇴계가 곤양까지 걸어서 가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안동은 내륙지방이기 때문에 바다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걷고 걸어서 사천에 오니 바다가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밀물과 썰물이 달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당시 이황에게는 낯선 풍광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이며 선비정신을 가졌던 퇴계 이황이 왔던 곳에 곤양향교가 있다. 퇴계 이황과 곤양향교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없으니 창건 연대는 미상이고 곤양 군수 신오가 향유들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건한 것은 1807년이다. 현존하는 건물로 대성전과 7칸의 명륜당, 전직사(殿直舍)·동재(東齋)·풍화로·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남아 있다. 


사천의 곤양으로 왔다는 것은 알겠지만 퇴계 이황의 흔적이 조금 더 남아 있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은 들었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는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이다. 이황은 어릴 적에는 숙부 이후에게 글을 배우고 그 후로는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여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 착한 바탕[理]이나, 태어나 살다 보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氣]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이황은 평생을 자기 수양을 하는데 힘을 썼다. 

향교에 오면 철학적 성찰이 왜 필요한지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본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왜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다지게 한다. 대단히 차분하고 합리적이었던 성격의 이황은 투호를 즐겨했다고 한다. 일정한 거리에 둔 병에 던져 넣는 놀이인 투호는 온몸의 균형뿐만이 아니라 정신력 집중에도 도움이 된다. 양궁이나 사격과 비슷한 느낌이다. 


곤양향교는 왠지 퇴계 이황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퇴계 이황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 후반 동인, 서인으로 갈라질 때 동인 계열에서는 퇴계를 내세우고 서인 계열에서는 율곡을 내세우면서 당파싸움을 하게 된다. 퇴계 이황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때 그의 학문은 하나의 지도이념으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퇴계 이황은 바다에서 조석을 보면서 시를 남긴다. 


작도는 작은데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鵲島平如掌 
오산은 멀리 마주하여 우뚝하구나 鰲山遠對尊 
하루아침 동안에도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니 終朝深莫測 
예부터 이치란 궁구하기 어려운 것 自古理難原 
숨 한 번 쉴 사이에 땅이 포구가 되고 呼吸地爲口 
조수 들락날락하는 곳에 산은 문이 되네 往來山作門 
고금의 많은 주장 가운데서 古今多少說 
결국 누구의 말이 정곡을 찌를 것인가 破的竟誰言 


꽃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덕은 만년을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결국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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