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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6. 2020

배향 (配享)

충곡 서원에 배향된 이민진

누군가를 모신다는 것은 후세에 알리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행적이나 가문에 큰 의미가 있다.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 따위에 모시던 일을 의하며, 대체로 조선 후기 이후에는 서원에서의 배향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데 논산의 충곡 서원에는 이민진이 배향되어 있다.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계백(階伯)과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것이 충곡 서원이다. 

충곡 서원이 세워진 이후로 이현동(李賢童)·박증(朴增)·김정망(金廷望)·김익겸(金益兼)·김홍익(金弘益)·이민진(李敏進)·김만중(金萬重)·박종(朴種)·조병시(趙秉始)·김자빈(金自殯)·이학순(李學純) 등 11명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중 이민진은 조선 후기의 충신으로 논산과 계룡을 이어주는 국도변에 정려가 세워져 있는데 정려는 향토문화유산 제1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피난하였는데 이때 논산에서 연산 현감 김홍익과 함께 3,000여 병의 의병을 모집하여 전장에 나가게 된다.  

정려에 홍살문이 세워지는 것은 그 의미를 더 두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민진은 검은 행전과 버선을 신고 죽기를 각오하였지만 광주의 험천에서 청나라의 기병과 전투를 벌였으나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그 후 인조 15년(1637) 선약장군훈련원판관에 증직되었고 순조 33년(18334)에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참판관에 추증되었다. 수조 34년(1834)에 정려를 하사 받게 된다. 

정려의 형태는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이며 자연석으로 팔각형 석주 4개를 가공하여 주초석에 둥근 나무기둥을 세워두었다. 상층부는 겹처마와 팔작지붕을 다포양식으로 건축하였다. 단청도 아름답게 해서 품위를 높여 두었다. 

정려안에는 이민진에 대한 공을 알릴 수 있도록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국가의 특전이 지급되는 것은 지금 보훈대상자와 유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절의와 선행이 있는 자는 장권한다. 효자와 조부모의 봉양에 성심을 다한 손순(遜順), 절부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우애와 화목을 지켜 칭송을 받는 목족, 가뭄, 기근, 천재지변으로 기아에 처한 백성을 구환한 백성 등은 매년 연초에 기록하여 계주 한다” -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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