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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4. 2018

합덕 수리민속박물관

수리에 대해 배우는 공간

지금도 물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과거에는 지금보다 그 중요성의 비중이 훨씬 컸었다. 궁궐이나 읍성 등을 조성하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공사는 바로 수리시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무거운 중장비도 있고 다양한 공법들이 발달해서 시공기술이 어렵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인력에 의존했던 과거에는 그걸 만드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이곳 합덕지역은 삽교천이 흐르고 넓은 평야를 형성하는 곳으로 이 지역의 문화를 들의 문화라고도 부른다. 


수리시설로 잘 알려진 곳은 김제의 벽골제이지만 당진의 합덕제 역시 이 너른 평야에 곡식을 키우기 위해 활용된 중요한 시설로 하늘을 향한 농민들의 기원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합덕제를 만들어놓고 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둑제를 지내며 합덕 방죽의 물을 이용하여 농사짓는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용샘과 용충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는 세시풍속으로 풍년이 들게 기원하는 행사인 볏가리대 세우기와 용이 합덕 방죽을 갈아 생겼다는 용갈이 등이 이곳에 전해져 내려온다. 

수리문화관에 들어가 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합덕 방죽에 가보지 못했겠지만 사람이 죽어서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너 생전에 합덕 방죽에 가보았으냐?"라고 물어보았다고 할 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수리문화관에는 합덕 방죽이 자리하게 된 전체적인 과정을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조성해두었다. 우선 지엽 부설 공법을 통해 땅을 다지는데 이는 백제시대에 익숙한 토성을 쌓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위를 무리 말뚝공법을 통해 다시 한번 그 토대를 다진 후 보막이 작업등을 거쳐 방죽을 만들어 놓는다. 

수리란 물을 농사짓는 데 사용하거나 식수로 이용하는 일을 말하는데 물의 이용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는데 기본 조건으로 수리사업은 농업용수, 공업용수, 생활용수의 개발 사업으로 구분되며 한반도에서는 농업용수의ㅣ 개발 사업 위주로 발달해 왔다. 특히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한민족의 문화에서는 토지의 생산성을 위한 수단으로 포강, 제언, 집수암거, 보, 양수정 등이 있다. 

합덕 방죽은 합덕읍 운산리와 성동리 사이의 너비 0.7 ~1.5km 정도에 이르는 넓은 하천 계곡의 끝부분을 막아 축조된 저습지 둑으로 두 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제방은 전통적인 공법에 따라 순수한 흙을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음이 판명되었다. 

지금도 연꽃이 많은 합덕 방죽은 못 안이 연으로 가득 덮여 연호, 연지, 연제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합덕 방죽은 1960년대까지 내포문화의 기반을 형성한 젖줄로 김제 벽골제, 연안 남대지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제언이었다. 상흑 지역의 논에 관개하는 상흑 수문, 하흑 지역의 논에 관개하는 하흑 수문, 고평 지역의 논에 관개하는 고평수문, 옥금지역의 논에 관개하는 옥금수문, 도리수문, 본동 수문, 창합수문, 제물수문 등 상당히 많은 지역에 물을 공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궁남지에 가도 이런 무자위라는 수차가 있는데 수차는 물을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기도 하지만 다양한 목적에 의해 활용되기도 했었다. 

합덕 수리민속박물관에는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약간의 물과 손의 움직임으로 지하수를 퍼 올리는 수동펌프기를 비롯하여 양수 및 탈곡하는 원동기의 일종인 발동기, 종형 원심 펌프의 일종인 버티컬펌프등을 만나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고단 했겠지만 지금만큼 복잡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사용하는 살포를 들고나가며 논을 물꼬를 트기도 하고 가래를 이용해 흙을 파서 논 사이에 수로를 만들던 사람들의 삶이 이곳에 있다. 

합덕 방죽에 심어져 있는 느티나무에서는 초록색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합덕 방죽의 물을 흡수해서 새 생명의 싹을 키워내고 있다. 합덕 방죽은 길이가 1,771m에 이르며 저수면적은 103ha와 물을 이용하는 면적은 726ha에 이를 정도로 큰 저수지였으며 12,000명의 둔병과 말 6,000 필을 후백제의 견훤이 주둔시켰을 때 합덕제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It is certain that the reservoir predates the Goryeo Dynasty and considering its similarities to the Byeokgolje reservoir in Gimje, it may even ascend to the Baekj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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