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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5. 2018

태실지

사천에 있는 세종, 단종의 태실지

원래 조선왕이 태어나면 태실은 전국의 좋은 자리에 옮겨 놓고 오랜 시간 왕조의 건재함을 빌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태실이 일제 강점기에 관리하기 편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1928년 경기도 양주로 옮겨져서 서삼릉 태실에 강제적으로 옮겨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단종과 세종의 태실 역시 이왕직에 의해 고양으로 옮겨졌고 지금 사천에 있는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는 그냥 터만 남아 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세종대왕의 능은 경기도 여주에 있어서 여러 번 가본 기억이 나는데 세종대왕 태실지가 사천에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전국에는 조선왕조 26대 왕들의 태실지가 좋은 곳의 택지 위에 만들어져 있다. 생각 외로 세종대왕의 태실지가 소박한 것이 의외였다. 

먼저 단종의 태실지를 찾아가 본다. 비운의 국왕이었던 단종은 숙부에 의해 끌어 내려졌다. 조선왕실의 경우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즉시 백자 항아리에 담아 산실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전국의 명산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왕실이 국운과 연결된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하고 그 뿌리를 없애기 위해 이왕직(조선의 왕실을 관리하던 직제)이라는 기관까지 만들어서 태실을 관리했다. 

단종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여러 번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이곳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태실지를 알리는 비의 일부는 깨져있었고 군데군데 단종대왕의 태실을 알리는 석물들이 깨진 채 남아 있다. 

태실은 보통은 이런 석등처럼 보이는 곳에 넣어놓고 봉인한다. 지금도 아이가 태어나면 태실을 잘라서 잘 보관하던가 줄기세포의 보관을 위해 병원에 보관하기도 한다. 단종의 태실은 1441년에 단종이 태어나자 세종대왕이 자신의 태실 앞쪽에 손자의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하면서 조성되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구들이 세종의 태실을 크게 훼손하였을 때 단종의 태실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태실이 길지에 있다는 것을 안 일제는 이곳에 있는 태실을 양주로 옮기고 이곳 땅도 민간에 모두 팔아버렸는데 그래서 이곳에는 일반 사람들의 묘가 들어서 있다. 

단종의 태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앞쪽으로 나오면 논이 있는 곳의 부근에 세종대왕의 태실이 있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을 준 것이라고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아도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조선은 새로 태어난 왕실 자식들의 태를 묻기 위해 특별히 태실 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에서는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 대사를 보내 그것을 묻게 하였다. 세종대왕의 태는 왕위에 오른 해인 1418년에 이곳에 봉안되었지만 역시 일제 강점기 당시 양주로 강제적으로 옮겨진 후 이  땅도 민간에게 넘어간다. 

세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것은 영조 때 세운 비석과 주변에 흩어진 석조물을 통해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원래 원형을 알 수 없도록 변형된 석조물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한 번 훼손되고 다시 일제강점기 당시에 훼손되었다. 왕실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던 태실지는 민간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였는데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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