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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1. 2018

유허지

공주 이유태 유허지

유허지와 유적지는 과거 사람들의 역사적 흔적이나 유물 혹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유적지는 물리적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유허지는 그 흔적은 거의 없고 터만 남아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유허지에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를 세워 기념하는데 이러한 비를 유허비라고 한다. 대전 충남에는 성삼문 유허지, 김옥균 유허지, 이유태 유허지 등이 대표적인 유허지이다.


공주의 대표적인 유허지는 이유태 유허지와 김옥균 유허지로 이유태 유허지는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구도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이유태 유허지는 충남 공주시 중등 골길 54-7에 있다. 마침 방문했던 날에는 이유태의 후손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서 사람들이 이어진 공간에 많이 있었다. 조선 현종과 숙종대의 문인이었던 이유태는 학덕이 높은 유학자로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남인의 반대편에 있던 이유태는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다. 이곳 중등 골에서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현재 이곳에는 고택과 이유태를 제향 하는 용문 서원이 있다. 용문 서재는 이유태에게 배움을 청했던 문하생들이 거주하면서 공부했던 곳이다. 이곳에 세워진 용문 서원은 과거 용문 서재가 있던 자리에 유림들과 합의하에 1986년 용문 서원을 건립하게 된다. 

지금도 이곳은 후손들에 의해 활용이 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공주 시민들에게도 한문 등을 가르치고 있다. 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근본은 잘 사는 데에 있다. 본관이 경주인 이유태는 계룡에 고택이 남아 있는 사계 김장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합께 북벌 계획에 참여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유태는 충청 오현으로 송준길, 윤선거, 송시열, 유계가 이유태와 함께 충청 오현이다. 현종이 무려 22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거절하고 이곳으로 오게 된다. 

조그마한 문으로 열려 있는 세상 그것이 배움과 앎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그마한 문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조그마하게 보이지만 그 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문이라는 것은 그런 역할을 한다. 사헌부 대사헌이라는 중요한 자리도 거절하고 공주의 중등골이라는 곳으로 들어왔을 때는 후학들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된 이유태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후손들에게는 다시 그의 가르침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를 만들게 된다. 이유태는 15세가 되던 해에 공주에서 살고 있던 문인인 만희 민재문으로부터 본격적인 학업을 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사람이 되어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 주변의 일을 걱정하는가라는 생각으로 학문 정진에 전력투구하였다고 한다. 초려 이유태는 대전의 유명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과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바른말을 하며 시대적 폐단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들여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던 초려 이유태의 흔적은 그의 시대정신이 공주의 한적한 공간에 남겨져 있다는 것 만으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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