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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8. 2018

고성 소을 비포 성지

바다를 지켜라. 

성지라고 해서 처음에는 천주교 박해를 받아 죽은 교인들을 기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 그대로 성이 있었던 공간의 흔적인 성지였다. 성지 (聖地)가 아닌 성지 (城址)가 소을 비포 성지다. 고성 소을 비포 성지만큼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은 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곳이 있을까.  남쪽 야산의 해안 경사를 따라 자연 요새지에 축조된 석성으로 지금은 길이 약 200m의 성벽 높이 3.2m, 너비 5m 정도로 남아 있던 것을 지금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그 형태로 복원해 두었다. 


고성의 바다 체험마을이 있는 곳을 돌아가는 곳에 성문이 보인다. 처음에는 천주교 성지가 있는 곳에 성문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뒤쪽으로 돌아간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서 있는 이 성은 남해로 들어오는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대동지지』 고성진 보조(固城鎭堡條)에 “舊所乙非堡 西四十七里 初置權管 成宗二十二年 築城 周八百二十五尺 宣祖三十七年 移于巨濟之水營址(구소을 비보 서 47리 초치권관 성종22년 축성 주825척 선조37년 이우거제지수영지)”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 소을 비포 성지가 있는 곳은 동화리로 동화 어촌체험마을의 입구에 만들어져 있다. 낮은 야산에 성이 복원이 되어 있는데 통영을 지나 남해 사랑도와 사이로 들어오면 이곳에서 한눈에 보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성으로 철벽방어를 위한 입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수군과 같이 방어를 할 경우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간다. 다시 복원된 성은 깔끔하면서도 성안으로 들어가서 보는 바다의 풍광이 좋아서 좋다. 공식적인 기록은 성종대로 나와 있지만 세종실록에도 소을 비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이전에 방어지역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성 소을 비포 성지가 있는 곳의 바다는 섬들이 바다의 풍랑을 막아주는 곳이어서 평온하다. 바다가 출렁임이 없어서 어선들이 정박하기에 괜찮은 지역이다. 성지가 있는 이 곳은 빛도 거의 없고 공해도 없는 곳이어서 밤에 별 빛이 잘 보이는 곳으로 조리개 노출을 열어두면 별빛을 잘 담을 수 있다. 

해안에 돌출한 구릉 정상부에 올라서서 고성의 바다를 바라본다. 해안 경사를 따라 축성된 이곳은 생각 외로 공격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곳에 주둔해서 적과 싸우기보다는 임시로 군사를 쉬게 하고 주둔했던 곳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성문 역시 복원되었는데 200m 정도는 주춧돌이 지상에 남아 있고 높이 3.3m, 길이 5m 정도는 원형의 성지를 양쪽에 두고 성문을 복원에 두었다. 양쪽에 옛 성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2005년에는 성지 내에서는 9채 이상으로 추정되는 병영과 군사 관련 집무시설 등 건물터가 발굴돼 조선시대 '수군만호(水軍萬戶. 종 4품 무관직)'가 지휘하는 병력들이 주둔하면서 다른 성에 대한 보급과 선박수리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완패를 한 청나라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마 관조 약에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일본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지만)을 완전히 상실하고 같은 해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다. 을미사변이 있던 해에 한반도의 바다 통제권을 지키던 삼도수군 통제영이 폐지가 되면서 이곳은 폐허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복원되어 고성의 잔잔한 바다와 옛 방어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이 순간이 좋다. 


고성 소을 비포 성지는 1994년 7월 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139호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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