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이며 경제학자였던 홍대용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서 벗어나다

진수 : 교수님이 홍대용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해서 주말에 천안홍대용과학관에 다녀왔어요. 가서보니 혼천의를 직접 제작했던 것이나 세계가 둥글고 자전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앞서 나갔던 주장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교수 : 18세기에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어. 당시 세계 경제의 비중으로 볼 때도 청나라는 거의 중심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막대한 은을 쌓아놓고 있었거든. 영국의 경우 대중국 무역적자폭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졌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불씨가 자라나기 시작할 때였으니까 홍대용의 생각은 시대를 관통했다고 볼 수 있지.


MG0A4625_resize.JPG 홍대용 선생 생가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진수 : 제 친구와 토론 중에 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결국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 친구는 대원군은 최선의 선택이었고 청나라와 서양의 강국이라는 선택지에서 청나라를 선택하고 서양은 배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미 홍대용은 100여년 전에 그 가능성을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네요.

교수 : 열린 지식이라는 것은 모든 것에 가능성을 두고 열어놓아야 가능한거야. 광범위한 지식의 습득을 통해 깨인 통찰력을 따라가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가기란 쉽지 않아. 특히 1773년에 홍대용이 내놓은 의산문답에서 언급된 무한우주설은 지금의 Big Bang (점에서 시작한 대폭팔에 의해 우주의 팽창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이론)을 생각나게 할 정도이니까.

진수 : 저는 Big Bang의 이론적인 내용은 잘 모르지만 미국CBS에서 하는 드라마 빅뱅이론에서 나오는 천체물리학은 접해본 적은 있어요. 홍대용은 그냥 조선 후기의 과학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정도까지 생각이 미쳤을 줄이야.

교수 : 그것 뿐만이 아니야. 홍대용이 생각했던 지전설(地轉說)은 ‘땅이 한 번 돌면 1일이 된다(地一轉爲一日)’라는 지구 자전설을 말하는건데 이건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물리학자 '푸코'가 1851년에 지구자전설의 가설을 푸코진자로 증명(판테온 사원의 천장에 67m인 실로 28kg의 추를 매달라 진동시켜 진동면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여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한 것과 시대적으로 비슷하기까지해. 푸코는 이를 인정받아 코플리상을 수상했어.

진수 : 아 생각나요. 저 중학교때 학교에서 국립중앙과학관에 가서 본 적이 있어요. 그게 지구 자전설을 증명할 수 있는 거였군요. 별 생각 없이 본 것 같은데. 들어보니 위대한 과학자였네요.


MG0A4626_resize.JPG 홍대용 선생 생가지의 빈터

교수 : 홍대용은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역임하고 1780년 영주군수(榮州郡守)등의 벼슬도 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생각했던 경제정책과 노동에 대한 생각, 국왕에 대한 비판을 독점하고 있던 사간원(司諫院)이나 관원의 임명에 관여하는 등의 사헌부(司憲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자고 했던 것은 현대식 민주사회의 근간이 되는 주장을 눈여겨봐야해.

진수 :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요.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지 이렇게 깊이 알아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교수 : 나는 그냥 지식을 받아들이라고 하는게 아니야. 미국이 하는 교육처럼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가지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으면 돼.

진수 :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제가 아는 분야에서는 비판적으로 질문해 볼게요. 그래도 홍대용은

그 능력만큼이나 금방 벼슬에 올랐겠네요.

교수 : 글쎄. 난 시험이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긴 해도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한 번에 과거에 급제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홍대용은 과거에 수차례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어.

진수 : 음보(蔭補)라면 과거에 의하지 않고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관리로 채용한 거잖아요. 신분타파를 주장하던 홍대용의 태도와 맞지 않는데요. 자신이 능력 있다고 과신한 거 아니에요.


MG0A4624_resize.JPG 담헌 홍대용 선생의 묘

교수 : 자신은 조상 덕분에 벼슬에 올랐으면서 신분타파를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는 맥락으로 보면 유사해. 시험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한다고 볼 수는 없거든.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아무리 조상의 벼슬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아무튼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홍대용의 경제정책의 토대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라고 볼 수 있지.

진수 : 균전제요? 땅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이를 경작하게 한 후 세금을 걷는 다던가 군역의 의무를 지우게 하기 위한 기본 제도를 말하는 거죠?

교수 : 균전제는 홍대용만의 생각은 아니었어. 수많은 실학자들이 균전제를 주장했었는데 제대로만 실행이 된다면 국가가 부강해지는 장점이 있어. 세출 분야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라고 하면 바로 세수 확보야. 세율을 인상 하던가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는 것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양반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어. 그렇다고 하면 돈을 만드는 방법 중에 국채발행이 있지만 식민지 조선을 제외하고 국채를 발행한 적이 없으니 제외해야해. 그렇다면 조선은 조세 확보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던 거지.



MG0A4614_resize.JPG 천안홍대용과학관

진수 : 그런데 결국에는 제대로 안되어서 조선의 국고가 비어가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예산조차 확보하기 힘들었다는 거죠? 부병제 역시 이론적으로만 보면 괜찮아 보이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잖아요.

교수 : 맞아. 부병제를 말하려면 균전제가 당연히 따라갈 수 밖에 없어. 그 이념은 병농일치인데 국가에서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농민은 그 대가로 군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지. 먹고 살길을 마련해 준 다음 그 대가로 나라를 지키라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것 같긴 해. 국가에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진수 : 이미 땅은 받았고 1년에 정해진 기간 동안만 군역의 의무를 지면 되니까 열심히 할 필요도 없었겠네요. 전쟁이 일어나도 죽어라고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 죽으면 자신만 손해이니까요.

교수 : 홍대용의 경제정책은 한계가 있었던 셈이지. 천 여년 전에 부병제를 채택했던 당나라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니까. 백성도 먹고 살게 해주고 군사비용도 줄일 수 있다는 관념적 환상이 달콤 했을거야. 조선 500여년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열악한 국가 재정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거야. 그나마 살기 좋았다는 세종이나 정조시대에도 백성들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어.

진수 : 비 전문적인 군사집단을 운영하던 조선이 직업군인이 메인이 되었던 일본에게 패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네요. 앞서나간 생각을 가졌던 홍대용 조차 부병제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거 아니에요?

교수 : 그 시대적 상황에서 홍대용이 생각할 수 있는 제도는 많지 않았을거야. 과학적인 업적이나 교육관과 왜곡된 과거제 폐지등을 주장하여 능력있는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자 했던 홍대용을 기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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