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닿아 있는 불편한 진실
2018년에 예열 과정을 거쳐서 2019년에 본격화될 이슈는 바로 불평등과 혐오다. 25년 전에 비교적 어린 나이(?) 였을 때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다. 당시 어머니는 부동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 당시 필자가 어머니에게 주장했던 것은 앞으로 부동산에 한국의 많은 돈이 집중될 것이고 이는 사회적 갈등과 상당히 큰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고 결국 경제동력까지 잡아먹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돈만 있으면 부동산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분위기는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부동산 폭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극소수만 빼놓고 모두가 패배자가 되었다. 기득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는 가족 회식이나 여행을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했던 것을 이 땅의 풀뿌리 같은 국민의 삶이라고 자신에게 주입시켰다. 그리고 그 삶을 자식에게도 강요를 했다.
부동산에 부가 집중된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빼앗아간다는데 있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소득보다 지대가 벌어들이는 소득이 훨씬 커지고 돈이 모두 부동산에 묶여 있는 가운데 돈이 돌지 않는다. 내수경제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바보의 생각일 뿐이다. 지금의 정권이 임기 내에 그걸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동안의 세월만큼이나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소득의 재분배 과정과 일관된 정책의 추진으로 25년이 지난 2045년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을까. 1년을 살기에도 아니 한 달을 살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조급하게 바랄 것이고 이는 정치에서 활용하기가 좋다. 솔직히 5년이라는 짧은 집권기에는 기초만 만들기만 해도 성공적이다. 사회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냥 기초만 쌓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보수와 일부 언론은 마치 내일이라도 망할 것처럼 몰아가면 바꿔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TV와 예능, 일부 언론의 문제는 심각하다. 돈을 번 것을 자극적으로 부각하고 이를 통해 마치 삶의 올바른 길처럼 부각한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게다가 기회까지 균등하지 않다. 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만큼 소득을 올리는 데에는 문제는 없다. 그러나 기회조차 앗아가는 것이 자본주의 본질은 아니다. 경제대공황 때 대 압착으로 경기불황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대 압착은 대부분의 국민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대기업이나 기득권에서 성장이 낮아지면 어디서 돈을 빼내겠는가. 결국 없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빼내는 것이 일상화될 것이다. 비정규직화, 위험의 외주화, 외국인 근로자를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단가를 낮추게 될 것이며 그걸 제한한 입법은 구멍이 어느 정도 뚫리게끔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할 것이다. 비록 진보라고 물리는 정치 축에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문제시되는 부동산 정책을 실시할 것이다. 예를 들면 3기 신도시 개발 같은 것은 해서는 안될 부동산 정책이다. 마치 수도권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줄 수 있는 기회를 확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키고 공고한 부동산 가격을 유지시킬 뿐이다.
그린벨트 등을 풀어서 수도권에 택지를 공급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괜찮은 대부분의 일자리는 수도권에 가야 찾을 수 있으며 그곳에 부동산을 사지 않으면 당신에게 미래는 없다. 그 가정에는 경제성장률이 1980년대와 비슷하며 소득이 받침이 되어야 한다. 지금 2030 세대에게 그런 미래가 있을까? 없다. 결국 사람의 부속품화는 가속화될 것이고 없는 시간 속에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여유는 더 줄어들어 근시안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2019년은 자영업자들은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고 시간이 지나 2020년이 되어도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최저임금의 프레임이 아니라 부동산이라는 바로 활용하지 못할 자산에 묶여 있는 돈과 지대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을 해서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경제적인 불평등의 가속화는 1997년에 본격화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기업이나 재벌들은 1차원적으로 자본을 축적했다가 IMF를 겪으면서 더 많은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에게서 배웠다. 문제는 미국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자본소득에 대한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만한 것만 삼키고 불이익은 뱉어 내었다. 기회는 균등해야 된다는 것에는 국가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 것에도 적용이 되어야 된다는 점이다. 국가 세금으로 살려놓은 회사에서 근로자들 혹은 국민들에게는 그 어떠한 혜택도 돌아오지 않고 그 과실은 온전하게 그들에게만 돌아갔다.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소득도 늘어나지 않고 미래가 없는 가운데 2030 세대들은 어떻게 할까. 언론이나 기득권들도 그들의 불만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기에 버거운 사람들에게 제시된 단어는 바로 혐오다. 혐오는 어떠한 이득이나 이해관계가 없어도 발생할 수 있다. 보통 갈등은 이득이나 이해관계가 명확하다. 즉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점이다. 혐오는 가해자이면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을 하게끔 한다.
데이트 폭력 혹은 묻지 마 범행으로 살해된 여성이 있으면 그걸 남녀 젠더 갈등이자 혐오로 만들어낸다. 사실관계를 떠나 혐오는 현실세계에서 잠시 벗어나는 마약의 역할을 한다. 사회의 문제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반대 측에 있는 사람들에게 몰아 버리면 된다. 게다가 언론은 이때다 싶어서 몰아가고 재생산을 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까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은 이념 논란이었다. 그렇지만 오래되었고 케케묵은 이념 논란이 더 이상 먹히지 않으면서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혐오가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다. 남녀 갈등,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의 갈등, 성소수자, 외국인 근로자, 장애인들,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생 등으로 확산해가고 있다.
생각을 바꿔도 나의 본모습은 바뀌지 않으며 (Changing What You Think Doesn't Change Who You Are ) 새로운 탐험에 낡은 연장은 필요 없다. (You Can't Lanunch A New Quest Whith Old Baggage)고 한다. 나의 본모습은 남자라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지만 생각은 바꾸지 않고 박탈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서 문제를 찾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낡은 연장을 가지고 새로운 탐험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까지만 적용되었을 낡은 연장은 버리고 이제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연장을 가지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이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나부터 시작하는(Start With Me)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앓아 왔던 문제는 쉽게 풀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혐오는 줄일 수 있다. 혐오를 줄여가다보면 이런 문제를 만든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직시하고 더 이상 미래가 없어 보이는 비전보다는 수정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모든 신념은 검토할 필요(All Beliefs Are Worth Examining)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자는 혐오할 수 없다. 강자를 혐오하더라도 강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혐오는 약자를 향한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비겁하다. 불평등과 혐오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불평등이 고착화되면서 혐오가 만들어졌으며 혐오가 만연해감으로 인해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