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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4. 2018

성지

완주의 천호성지

고난과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보통 고난과 역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사에서 생겨나게 된다. 사람에 따라 고난과 역경을 외면하고 피해가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정면으로 맞선다. 천주교라는 종교는 수난이라는 고통을 딛고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께 걸어가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예루살렘의 여정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제자가 배반하고 백성들을 등을 돌렸으며 최후의 만찬을 하고 이후에 붙잡혀 재판을 받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산에 오른 후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인류는 모든 죄의 사람을 받고 구원받게 되었다.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에 물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류는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고 한다. 예수가 죽음에 이르게 된 십자가의 모양은 라틴 십자가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해 속죄 제물이 된 예수를 상징한다.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 자리한 성지 탐방은 많이 해보았는데 전라북도의 성지 탐방은 많이 가보지 못했다. 그중에 천호성지의 '천호'는 박해시대의 ‘천호’(天呼) 마을은 “천주(天主,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는 뜻을 지닌 천주학쟁들의 거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은 충청도의 박해에서 파생된 곳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한 시점에 충청도 쪽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이주하여 현재 순교 성인들의 묘역 맞은편인 무능골에 정착하게 된다. 

에수를 말할 때 부활은 빼놓을 수 없다. 1866년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6명의 성인(聖人) 중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基植, 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 등 소양면 대성동 신리 골 출신의 3위와 이명서(일명 在德, 1821~1866, 베드로) 성인을 포함한 모두 4위의 성인이 순교하였다. 

종교와 상관없이 관련된 역사를 탐방해볼 수 있는 천호성지다. 천호성지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건축학적으로도 상당히 잘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기원전후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먼 과거에도 원시종교를 살펴보면 태양과 별,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의 상징이었는데 오른쪽과 왼쪽에서 비롯된 선이 두 직선을 통해 하나로 만나고 한 점으로 모여주는데 이는 지상과 초자연적 세계가 십자가를 통해 연결되는 통교의 선을 의미한다. 

천주교에는 총 일곱 개의 성사가 있다. 태어나거나 새로이 받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바로 그것으로 사람의 생활패턴의 중요한 모든 단계와 시기에 관련이 된다. 자연적인 삶의 담계들과 영적인 삶의 단계들이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어 보이고 연관성이 있는 성사는 혼인성사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서로 신뢰하여 함께 같은 길을 가기로 약속을 하는 혼인은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며 살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되고 구원의 역사를 통한 혼인의 다양한 실현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혼인성사다. 

상당히 진귀해 보이는 물건들도 적지 않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1784년에 한국에는 천주교가 전파되는데 조선왕조에서는 정조 시기에 해당이 된다. 정조는 천주교 박해를 하지 않고 공존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801년 정조 사후에 순조가 즉위하고 나서 박해는 본격화된다. 주요 박해는 1801년, 1839년, 1846년, 1866년에 일어난다. 

다양한 십자가의 모양과 신성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종교와 상관없이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정순왕후는 남인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200여 명의 신도가 순교했는데 이때 정약용의 형제였던 정약종도 포함이 되었다. 정약용은 정조시대에 수많은 공을 세우고 수원화성을 만들 때도 큰 역할을 했지만 사후에 그의 꿈은 사라졌다. 

이 땅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박해는 정치와 연관성이 깊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조선 말기에 세도 세력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기해박해에는 70여 명이 참수되었다.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보면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이 나온다. 일부러 이런 디자인을 추구했는지 몰라도 고요한 느낌이 묘하게 전달이 된다. 저 아래에는 빛이 보이는데 조명의 이어짐이 자연스럽다. 

아래층에 있는 공간을 보기 전에 먼저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사파이어 글라스를 사용하여 하늘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너무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 않다. 그 아래에는 천사가 자리하고 있다. 

당진에 가면 솔뫼성지가 있는데 소나무가 있는 언덕이라 해서 솔뫼라고 부르는데 그곳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다. 그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것은 1846년 6월 5일로 이가 병오박해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인들의 모습이 나무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오늘 천국의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날입니다." - 성 정문호 발도로 메오

"그렇습니다. 저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을 내게 더 이상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 - 성 손선지 베드로 

이 땅의 마지막 박해는 1866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다. 가장 많은 순교자가 생겨난 이 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는데 이때 8,000~10,000명이 순교했으며 이 박해로 인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고 한양에서는 프랑스 군의 침입 소식에 수천 명의 백성이 피란길에 오르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에 대원군은 양이보국책(攘夷保國策)을 내놓으며 항전의 뜻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 변화의 시기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전후해 조선의 쇄국(鎖國)과 양이(攘夷) 정책이 한층 강화되어 결국 제국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땅에서 천주교가 자리 잡아가는 역사는 조선 후반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등함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정치적으로 활용하였으며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천호성지는 교인들의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도 연관성이 있어서 방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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