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사회를 알지 못하는 영화
한국사회는 상류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상류 =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상류는 정신과 삶의 행태, 물질적인 것이 잘 조화를 이루어 부족함이 없이 만족할 수 있는 마인드가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 상류사회는 그냥 상류를 흉 내려다가 실패한 미련한 사람들의 삶으로 그려냈다. 최근의 일련의 뉴스들을 보면 상류사회는 그냥 쓰레기 사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상류사회는 품격 있는 삶과 정신이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매일매일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는 게 그런 삶을 누리긴 힘들 것이다.
좋은 삶이란 만족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삶을 소유의 기준으로 본다면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것을 불가능하고 희소성이 있는 것의 가격은 계속 올라가기 때문이다. 일명 상류사회에 있다는 사람들이 만족하는 방법은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이 부족한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희열이다. 조금 더 낮은 존재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스컴이나 물질적인 것에 약한 사람들의 속성을 잘 이용한다. 그들은 상류가 아니라 정신은 하류이되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뿐이다.
영화의 슬로건처럼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추악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적이 한 번도 없는 곳이 상류사회였다. 그냥 추악함만이 남아 있는 곳에 교수인 장태준과 미술관 부관장 오수연은 더 높은 곳으로 레벨업을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성관계가 유일한 수단처럼 인식이 된다. 남녀관계에서 성관계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삶에서 돈이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듯이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타이틀에 얽매인다. 그래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수, 의사, 판사, 검사 등은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를 좋게 받는 직종이다. 정치인이란 게 한국에서처럼 뇌가 없어야 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일본이 왜 한국을 우습게 생각하는지 아는가. 그건 정치인의 큰 활약 때문이다.
"만일 치욕을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덕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를 존중해 덕을 지는 현자가 합당한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합당한 직책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해서 나라에 내우외환이 없어지거든 그때에 이르러서 정치와 형벌을 밝게 시행하면 아무리 큰 나라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나라를 두려워할 것이다."
상류사회로 진입하려는 이들은 그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지경에 이르자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 복수는 그렇게 합당하지도 않고 무모한 그 자체였다. 영화의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 상류사회가 아니라 비루한 사회라던가 실망 사회 정도로 말이다. 상류가 맑아야 하류가 맑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이자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