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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7. 2018

행담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전초기지 

1800년대 대원군은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아버지였던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것이다. 예산에 있는 남연군묘는 원래 있던 사찰까지 폐사시켜가면서 묘를 이장한 덕분일까. 대원군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그가 고종이다. 1846년에 이장하여 조성한 남연군묘는 후에 흥선대원군으로 불리는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다. 

묘가 조성된 1846년은 고종이 태어나지도 않을 때였다. 그 후 고종은 1852년(철종 3)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오른다. 

서해의 작은 섬  행담도(行擔島)는 지금 서해고속도로가 건설되고 나서 명물 휴게소로 자리 잡았고 1년에 방문하는 방문자가 1,0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고 지나쳐가기도 한다.  행담도(行擔島)의 정확한 주소는 충남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 516-4로  매산리(梅山里)에 딸린 섬. 면적은 0.16㎢에 불과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조성되고 나서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 

행담도는 당진과 아산, 예산으로 들어가는 요지에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한반도 서해의 특성상 오페르트는 행담도에 정박하고 수시로 서해의 땅으로 오갔다고 한다. 

함부르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오페르트는 1851년에 홍콩에서 무역업을 시작하였는데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1867년에 파산할 무렵, 에른스트는 당시 서역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조선과의 교역에 흥미를 느끼고  충남 아산만 해미현 조금포(調琴浦)에 들어와 조선에 통상 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이어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통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병인박해 탓에 실패한 후 1868년 프랑스 신부 페론(Feron)과 미국인 젠킨스(Jekins)를 대동하고 차이나호를 타고 충청도 행담도(行擔島)에 정박, 조선의 천주교 탄압에 보복한다고 구만포에 상륙한다. 

이곳 행담도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갈아탄 오베르트 일행은 가야동에 소재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헤치고자 하였다. 이것이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더 빚장을 굳게 걸어 잠갔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상상할 수는 없지만 휴게소 안쪽으로 들어오면 작은 섬과 멀리 보이는 당진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볼 수 있다. 통상에 실패한 오페르트는 돌아가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A Locked Country. Trips to Korea.)이라는 책을 지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휴게소를 가봤지만 행담도만큼 먹을 것의 매력이 많은 곳은 많지가 않았다. 

고속도로위의 섬이라는 휴게소는 운전자와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자 그 지역의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휴게소들 역시 지역마다 명물이나 특산품 혹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해놓은 곳이 많다. 

마치 일본의 한 여행지를 보는 느낌이다. 먹을 것들의 가격은 다른 휴게소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지만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관리가 잘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 하나하나와 군것질 거리나 요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행담도만의 먹거리가 있어서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행담도 푸드코트가 매출 1위를 한 것은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 중간, 상하행선 통합 휴게소, 아웃렛 등 위치적 이점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관리와 다른 휴게소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품질 높은 먹거리가 한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기도 하고 과거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전초기지로 정박하여 조선과 통상을 하려고 시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행담도 역시 역사의 한 기록으로 실록에 남아 있게 된다.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너희 나라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고종실록 - 영종 첨사가 오페르트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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