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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16. 2018

명당

사람이라 읽고 짐승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남연군묘를 처음 가본 것은 2015년이었다. 더운 여름날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천년사찰을 불태우고 아버지 묘를 썼던 곳이 바로 남연군묘다. 충남 예산의 덕산면에 자리한 묘다. 그 묏자리를 가지고 만든 영화가 명당이다. 천자가 두 명이 나올 수 있지만 그 후에는 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그런 명당자리에 욕심을 가질 정도로 흥선대원군은 야심가였다. 그의 마음에는 백성보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야욕만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무리를 해서 일을 했더니 몸이 탈이 났는지 2일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일은 나아질 듯하다. 덕분에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보게 되었다. 관상이라는 영화와 기시감이 드는 영화였지만 예전에 남연군 묘를 갔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었다.


남연군묘가 있던 곳은 천년사찰인  가야사가 있던 곳이다. 대원군이 묘를 옮기면서 이곳을 폐쇄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지해왔다. 이후 2012년 시굴조사, 1차 발굴조사를 거쳐 2013년에는 2차 발굴조사를 했는데 2014년에는 3차 발굴조사를 마치면서 '가야사'의 사명 및 사역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8동의 건물과 가람배치를 확인하였다.

조선 말기는 말 그대로 마른 수건을 쥐어짜기의 시대였다. 전국에 있는 땅 중에 양반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고 백성 혹은 노비들은 말할 수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런 모습의 변화는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능력을 백성들을 위해 쓸 수 있는 지관 박재상이 있을 뿐이었다. 역사와 인생은 생각보다 참 아이러니하다. 핏줄이 끊기다시피 해 찾아낸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옛날에 강화로 간 왕족의 후손이었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권문세가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혈혈단신으로 궁에 들어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역사상 조성 왕릉 중 명당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시대를 이어 건원릉(태조), 헌릉(태종), 영릉(세종), 건릉(정조), 남연군묘 등이 있는데 모두 왕의 자리인데 군으로는 남연군만 속해져 있다. 영화에서는 주로 헌릉을 명당으로 다루고 있다. 영릉 역시 옮겨간 곳이다. 솔직히 말하면 명당을 찾는 것이나 필요하지 않은 것 이상으로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자신과 후대만 잘 살자는 욕심에서 비롯이 된다. 한정적인 자원을 독점하겠다는 것은 누군가가 필요한 것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득이 될 수는 있으나 현명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명당이라는 것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잘되게 만들어주는 그런 대상이다. 굳이 예를 들면 현대의 건물주와 비슷하다고 할까. 내가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 들어오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는 자뿐만이 아니라 없는 자들도 또한 그러하다. 없는 자들의 그런 욕구를 알기에 중간에 있는 사기꾼들이 그걸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것은 착하던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약자는 그냥 약자이지 정의는 아니듯이 말이다.

원래 진짜 명당은 왕을 내는 자리가 아니라 자손들이 평온하게 살게 하는 자리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처럼 명당을 흥선대원군이 차지하였지만 결국 조선왕조는 그걸로 막을 내린다. 영화 속에서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역사를 판단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후손들은 모두 원만하게 막을 내리지 않았다. 욕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잠시 권력과 금전을 가질지는 몰라도 그것이 대를 이어 끝까지 이어진다고 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균형적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시스템은 만들어 놓을 수는 있다. 그것의 틈새를 만드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정치인이나 법조인들이다.  흥선대원군은 돈이 없는 망나니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는 흥선대원군의 집안은 넉넉했다고 한다. 사람을 끌어모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영화 속의 설정보다 이전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버지의 묘를 가야사에 있던 자리에 옮겼다. 이는 고종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이다.


뭐 그래도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청나라로 강제로 끌려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았으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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