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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04. 2018

구계서원

밝은 덕을 밝힌다. 

 이황(李滉)과 이정(李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구계서원은 지금 내삼문의 드잡이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講堂), 2칸의 주소(廚所), 3칸의 고자처(庫子處), 외문(外門)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원을 오면 우리가 배우는 이유를 다시금 자신에게 묻게 된다. 지금의 교육은 배움이 잘 사는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배움은 사물의 이치와 내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본성의 관계에서 기질로 나오는 사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 

서원을 처음 세우게 만든 이황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정(李禎)은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본관은 사천(泗川)인 이정은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  전라도 순천부사 등을 거쳤으며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구암 정사(龜巖精舍)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지금도 많이 배운 사람을 따르지만 언제부터인지 배움의 깊이보다는 직업이나 지위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서원의 원래 목적은 개인 수양이 완성되는 것은 결국 사회로 확산되어 백성을 새롭게 하고 도덕적인 감화를 받아서 풍속이 아름답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원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유효하지만 자본주의의 왜곡이 배움의 순기능을 의미 없게 만들고 있다. 

구계서원에 모셔진 다른 인물인  김덕함(金德諴)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활동했던 사람으로 수많은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때 군기 시정에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명천·온성·사천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1636년 대사헌에 올랐던 사람이다. 

오래된 고택이나 서원은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1년에 몇 번의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망가지기 때문이다. 외삼문을 거쳐 들어오면 만나는 내삼문이 지금 수리 중이다. 

얼마 전에 지방을 갔다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하고 휴양림에서 해설사로 근무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부모가 제대로 배우 지를 못했는데 자식을 가르칠 수 있겠냐는 것이다. 50년대 60년대에 태어난 분들은 자식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해야 할 교육을 하지 않고 그 자식 세대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허리를 받치고 있다. 자신이 배워본 것도 없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예로부터 배워서 아는 사람은 구계서원이나 다른 교육기관 등에서 평생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한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은 없지만 곳곳에 쓰여 있는 글이 배움을 축약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 배움에 따르면 중화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를 통해서 성정을 함양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지금 구계서원은 수리 중이다. 구계서원의 외부 가파른 계단을 올라 풍영루(風咏樓)의 외문을 들어서면 경내에는 유생들의 글방 및 회의장이었던 서재(講堂, 不欺堂)와 동재(居敬, 明義齋)가 서로 마주하여 배치되어 있다. 저 정면에 보이는 내삼문인  중기 문(重起門)을 들어서면 높은 장대석 위에 위패를 모신 묘우(廟宇)가 배치되어 있다. 

"머무를 곳을 알고 난 뒤에야 일정한 방향이 있고, 일정한 방향이 있고 난 뒤에야 차분해질 수 있으며, 차분해진 뒤에야 평안해질 수 있고, 평안해진 뒤에야 사려할 수 있으며, 사려한 뒤에야 성취할 수 있다." - 대학


사천에 있는 구계서원에서 천천히 사색을 해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있다. 사람 사는 것이 별것이 있겠냐만은 의지가 확고한 자만이 배움의 길목에 있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처럼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조금의 노력은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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