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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05. 2018

천주학을 말하다.

금산 진산 역사문화관

종교라는 것은 원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철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지 개개인의 이득 추구나 많이 모여서 실력행사나 상대방에게 강권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의 새태를 보면 종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에서 많이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금산에 가면 이 땅에 천주학이 전래되면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는 진산 역사문화관이 만들어져 있다. 

인구로만 본다면 금산의 진산이라는 지역은 대도시의 한 동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지만 너른 면적에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어서 역사문화관이 조성될만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을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진산이라는 지역명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사건이라고 하면 적어도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일을 의미한다. 진산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기에 전시실의 이름을 진산 사건실이라고 명명했을까. 

유교는 배움을 의미하는 학문이지만 그 속에 삶을 제어하고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념이자 종교로 오랜 기간 이 땅에 자리해 왔다. 유교가 학문으로만 있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배움이 한정된 계층에만 제한되었고 또한 그 배움이 귀함 혹은 계급을 만들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 일반 백성들은 양반들이 배운다는 유학에서 멀어지고 신선술이나 도교, 불교, 풍수지리설에 빠지고 있었는데 이때 서양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양의 학문 중 하나라는 천주교가 이때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평등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성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 

정조 집권 시기인 1787년에 지방리에서 살던 윤지충이 상경하여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보통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가 되던 시기에 한국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비롯하여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자체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진산 지역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6대 후손인 윤지충 바오로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는 듯 유학자의 길을 걷다가 천주교 교리책을 공부하면서 천주교의 진리의 길을 따르게 된다. 역시 진산에 거주하던 권상연 야고보 역시 유학에 정진하다가 천주교에 빠지게 되고 제사를 금지하라는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일로 조선 조정에 의해 사형을 당하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불효를 하면 매를 맞는 일도 있었으니 신주를 태우는 것은 상당히 큰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당시 제사를 하지 못하게 한 교황청의 교황 베네딕트와 교황 클레맨스의 칙서 엑스 쿠오, 엑스 이랄 디에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고 신주도 모시지 말라고 한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 결정한 것으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지금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 자리에서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리고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고 진산 군수 신사원을 그 지방에 유배하게 된다. 

진산 사건실을 보고 나오면 진산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진산 문화실이 나온다. 

진산은 상당히 넓으 지역으로 진산에만 막현리, 지방리, 두지리, 묵산리, 행정리, 석막리, 교촌리, 부암리, 삼가리, 만악리, 엄정리, 오항리가 있다. 진산은 크게 서면과 동면으로 나뉜다. 자연경관과 역사문화로 나뉘어서 소개하고 있다. 

진산에 있는 고인돌은 몇 곳 가보지 못했는데 진산에만 막현리 고인돌, 만악리 고인돌, 장대리 고인돌, 만악리 관돌 고인돌과 교촌리 마제석검 출토지까지 적지 않은 유적들이 있다. 진산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대표적인 유적으로 집터와 무덤들이 있다. 

진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곡창 호남의 길목을 지켜냈다는 이치대첩지가 있고 원효대사가 대둔산을 둘러보고 창건했다는 태고사와 조선시대에 건립된 진산향교와 동학 농민군과 정부군의 격돌이 있었던 격전지도 자리하고 있다. 

그 지역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교육이 중요하다. 진산 최초의 교육기관이라는 진산향교는 조선 현재 진산중학교 자리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지만 영조 31년(1755)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진산 공립 보통학교가 세워지며 근대시기의 교육이 시작된다. 

진산에 있는 대둔산을 가봐서 대둔산이 어떤 풍광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대둔산의 낙조대, 오대산, 인대산, 백마산이 진산에 있으며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기에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인 공유가 있을 수 있었다. 

진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과 이야기들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진산을 단 하나의 마을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는 마을 곳곳에는 소소하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가면서 진산의 지역색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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