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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를 읽겠다.

거제 둔덕 청마생가

누구나 글은 쓸 수는 있지만 누구나 잘 쓸 수는 없고 누구나 시를 쓰지만 누구나 잘 쓸 수는 없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인은 한 명은 꼭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기리는 생가나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거제를 고향으로 태어난 문학인이 있었다. 문학계에서는 거두로 불려진다는 청마 유치환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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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를 온 것도 여러 번이지만 문학인의 흔적을 따라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마 유치환도 그랬을까. 계속 멋지고 좋은 것을 찾기 위해 써 내려갔을까. 통영에도 청마 유치환의 흔적은 있지만 통영하면 박경리가 먼저 생각나기 때문인지 거제가 먼저 생각난다. 그는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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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만 전달하는 기사가 아닌 다음에야 보통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써야 잘 써진다. 그래서 시인이나 문학인은 자신만의 집필실에서 글을 썼는데 보통은 그 공간을 재현해놓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고 한다. 바흐는 정장을 입고 작업을 했으며 로시니는 술에 취해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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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것은 우물에서 마중물을 붓는 것처럼 아니면 시동을 걸기 위해 모터를 돌리는 것처럼 예열 작업이 필요하다. 청마 유치환은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중에서 '행복'의 첫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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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는 그가 살았던 그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을 해두었다고 한다. 우물을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지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집에는 우물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글쓰기에는 특별한 비법은 없다. 다양한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지우고 조금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꾸준하게 정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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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집이지만 세간살이를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모아두었다. 청마 유치환은 인간의 생명과 그 운명을 많이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의 극한 상황에 자학적 분노의 밑에는 생명 의지가 있으며 인간의 숙명이며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잘 표현했던 '청마시초'에서는 그의 허무가 잘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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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거제도는 이런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마을을 축소모형으로 잘 표현해두었다.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는 볏짚으로 만든 초가지붕과 마당 한편에 작물을 심으며 살아갔다. 거제도는 따뜻한 곳이라서 작물을 키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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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옆에는 청마 유치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이면서 생애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왜곡되기 쉽고 일제에 편승하기 쉬운 그 시대에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이나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는 문학은 그것을 읽어줄 독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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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실의 나열은 글이 아니다. 특징적인 점을 포착해 집중적으로 묘사해야만 성공한 작품이다. 이목구비를 그릴 게 아니라 그 눈썹과 뺨의 세말힘을 살려 그 사람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라." - 이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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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청마,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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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그의 지인들과 친필 편지 그리고 제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청마 유치환은 1908년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번지에서 음력 7월 14일 유생인 아버지 진주 유 씨 준수와 어머니 밀양 박 씨 우수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간혹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 쓴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 보지 못했던 그 틈새를 보고 그것을 글로 옮길 때 가장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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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운 것은 청마 유치환이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생이었던 아버지 유준수는 내성적이지만 꿋꿋한 선비정신으로 옳게 이끌었으며 성격이 유달리 활달하면서 유머를 잊지 않았다는 어머니는 아들을 믿어주고 받쳐주었다고 한다. 청마의 글 '우연히 시인이 되었다'에 따르면 일본의 다카무라 고타로와 하기하라 사쿠타로 그 밖의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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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그날 절벽 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

- 청마 유치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은 무엇인가. 열정이라는 말, 자연이라는 말, 사랑한다는 말, 발견이라는 말 등 좋은 것도 참 많다. 니체는 사람의 정신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사자는 기존의 관념과 체계를 깨고 나아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와 자유를 향한 투쟁의 시기를 상징하고, 낙타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묵묵히 짊어지는 시기를 말하며, 어린아이는 죄 없이 순준무구한 긍정의 시기와 새로운 삶을 빚는 가능성의 시기에 비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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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청마 유치환의 모습이다. 전통적인 것과 진부한 것은 다르고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은 다르다. 천 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되고 천 개의 글을 쓴 후에야 좋은 글을 알게 된다고 한다. 청마의 시를 읽듯이 어제도 오늘도 책을 읽다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과식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생긴 배탈을 글로 써 내려가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다. 유치환이 급서 한 날은 1967년 2월 14일로 야간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다 급행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등성이에 올라 보노라면

내 사는 거리는 아슴한 저편 내 끝에서부터

내 발밑까지 첩첩이 밀려 닥쳐 있고

이쪽으로 한 골짜기 화장장이 있는 그 굴뚝에서

오늘도 차사의 연기 고요히 흐르고 있거니……

마침내 돌아와 전 같이 잔잔히 잔잔히

한 줌 불귀의 흔적 없는 자취로

거두어짐은

아아 얼마나 복된 맑힘이랴

- 청마의 유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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