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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16. 2018

심청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공원에는 통영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윤이상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윤이상이라는 작곡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오페라 축제를 위한 윤이상의 작품 심청 때문이었다. 심청이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위한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계획되면서  한국 출신의 작곡가가 사용하는 아시아적 소재와 서구의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음악을 선보였다. 

통영에 자리한 윤이상 기념공원에는 윤이상이 생전에 사용했던 차나 그 공간이 보존되어 있고 사용했던 물건들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독재가 서슬 퍼런 시대에 윤이상은 한국에서 1967년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인해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1967년, 1963년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했던 일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되었고,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체포해 서울로 송환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심청의 이야기는 한국만의 효를 실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부모를 모시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심청을 대표적으로 꼽는데 이것을 음악적인 드라마로 만든 것이 지난 1972년이었으나 그의 사상에 입혀진 색채 때문인지 몰라도 오페라 〈심청〉이 한국에서 초연된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1999년 서울 오페라 페스티벌의 무대였다.

이곳에 자리한 작품에는 윤이상이 추구했던 독특한 도교적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심청은 다르게 각색되었다. 윤이상의 심청은 천상(天上), 지상(地上), 지하(地下)의 세계는 심청이 지상의 영역이 아닌 천상의 선녀로서 인간으로 환생하여 태어났으며  특이할 만한 점은 심청을 사모하는 박 씨의 존재이다. 박 씨는 심청을 사모하여 심청과 결혼하고자 한다.

윤이상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음악은 고향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밤에 고기를 낚으로 바다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조용히 배 한가운데 앉아서 고기가 뛰는 소리와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노랫소리는 배에서 이어져 계속되었지요."

그가 꽃을 피운 독일의 한 도시 다름슈타트의 중앙부에는 동서로 흐르는 마인 강과 그 강의 지류인 니다강과 킨치크 강이 있으며 마인은 비스바덴 시와 마인츠 시 부근에서 이 행정구의 서쪽 경계선을 이루는 라인 강과 만난다. 동쪽은 바이에른 주, 남쪽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서쪽은 라인란트팔츠 주, 북쪽은 기센 및 카셀 구들과 접한다. 역사상 헤센 다름슈타트와 나사우로 알려진 지방의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그가 다름슈타트에서 선보인 것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Musik für sieben Instrumente)'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도교적 세계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윤이상이 독일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도교적 세계관이었다.  작품은 ‘민중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게 있는데 심청은 이 과정에서 전 인류의 어머니로 등극하면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구원의 메신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국을 사랑했던 태극기를 간직했지만 끝내 고국에서 숨을 거두지는 못했다. 태극이나 태극에 내포된 음양사상은 우리나라 고대의 문화유적이나 생활 습속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양상음하(陽上陰下)로 배치된 이유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윤이상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사용했던 바이올린도 볼 수 있다. 초기 바이올린은 대중음악과 무도회 음악을 위해 사용되었다가 17세기에는 바이올린이 실내악의 주요 현악기로 비올을 대신하게 되었다. 

통영에서 항상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고 나서 서독으로 건너가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2년 뒤인 1971년부터 가족들과 함께 서독에 귀화했다. 독일에서 살던 그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이듬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관현악 작품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5년 11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 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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