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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25. 2018

점, 선, 면, 공간

감성을 벼리다.

보통 예술작품은 어떤 캔버스 같은 2차원이나 공간에 표현이 된다. 크게는 소조, 조소, 매스 중심의 공간적이 작업을 통해 설치가 되는데 개념적인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어서 이해가 조금은 수월하다. 전시전에서 사용된 벼리다라는 의미는 불에 달구고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다로 의미로 글 쓰는 사람에게 생각을 벼려야 날카롭게 글을 써낼 수 있다. 

리각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지만 카페로도 유명한 곳으로 주말의 휴가를 즐기게 좋은 곳이다. 

눈이 내렸다. 그렇지만 천안에는 살포시 내려서 대부분 녹았다. 첫눈 내리는 날 듣고 싶은 노래나 읽고 싶은 책, 하고 싶은 말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점과 점이 이어지면 선이 이루어지고 선과 선이 만나면 면이 만들어지고 면이 세 개가 만나면 공간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시작이 있다. 감성을 벼린다는 것은 날카롭게 감성을 전달하고 싶다는 말인가. 

표면이 있으면 그 뒤에 숨겨진 이면이 있다. 사람들은 표면만 보려고 하지 이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면적 가치가 서로 공존해야 균형적인 시각을 이룰 수 있다. 상황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곳에 놓인 작품들을 시각 언어로 재 구성해본다. 

면에 걸린 작품들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처럼 어떤 성질은 다른 것으로 옮겨지면서 에너지가 옮겨가고 확장되어 간다. 

이 작품은 자연, 생명체와 기계를 품다는 것으로 작가는 미래에는 인간과 동, 식물 등 생물도 기계를 구성하는 금속, 엔진, 모터 등의 무생물과 유전자를 소통하며 얽혀 진화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이미 물리적 진화의 과정에서 시간, 장소, 바람, 속도, 방향, 공간, 물 등의 환경적인 변화에 따라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희미해지고 없어져가는 물건들이 많다.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리고 소비하는 것을 기념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을 찾아가야 할까. 

무언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것을 지고 걸어가는 동물의 모습이다. 뒤로는 천연색의 동물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 작품은 인생이라는 큰 짐을 지고 묵묵히 무리 지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의 삶에 대한,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자식에게 건네주고 자식은 또 자신의 짐을 더해서 힘들게 걸어가는 느낌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예술은 정치에 종속되어 정치를 찬양하였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국에 만들어져 있는 상들을 보면 당시의 권력자를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한 영웅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의 최전방에서 시민들의 희로애락과 같이 하는 예술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시대적, 문화적, 개념적 측면을 제시하는 순 환론적인 의미는 점, 선, 면, 공간과 연계가 된다. 인간 역시 그 속에서 함께 흡수되어 간다. 


이 작품에서 표현하려고 했던 공간을 정의할 수 있을까. 마치 영화 큐브에서 형상을 예측할 수 없이 변형되는 그 장면이 연상이 된다. 작가는 때에 따라 변화하는 심적, 물리적 공간에 대한 탐구를 대주제로 삼는다고 하는데 글 쓰는 사람 역시 인간에 대한 심적, 공간에 대한 물리적인 것과 그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써 내려가야 한다. 


Dot Line surface Space; put an edge on sensitivity

2018.10.18 ~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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