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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1. 2019

탈 혹은 면(面)

고성 탈박물관

얼굴에 쓰는 것을 보통 가면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탈’이라는 말이 가면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경상남도 고성이 자리한 곳에는 다양한 탈놀이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 탈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탈놀이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지 알려주는 탈박물관이 조성이 되어 있다. 고성에 가면 탈박물관을 한 번 들러본다 한 것이 1년 만이다. 고성을 대표하는 탈박물관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율대 2길 23에 잇는 고성 탈박물관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탈은 수천 년부터 만들어왔다. 놀이로서가 아니라 신앙으로서, 생존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탈의 거의 모든 것이 탈박물관에 있다. 

조개 탈은 처음 보지만 조개 탈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탈의 역사가 오래된 것인지 돌아볼 수 있다.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되었다는 조개 탈은 악귀를 쫓기 위한 탈로 보인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에는 주로 암각화에서 탈을 쓴 인물이나 탈이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처용무뿐만이 아니라 산대잡극이 연회 될 정도로 탈은 중요했다. 처용무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국 오방무의 영향을 받아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방상시는 중국의 고대 나례의 대표적인 신이라고 하는데 보는 것처럼 눈이 4개인 것이 특징이며 동서남북 사방을 잘 볼 수 있다는 주술적 표현으로 조선 말엽까지 사용되었다. 

충남에 최영 장군 사당을 가본 적이 있다. 무척이나 가파른 곳이어서 밑에다가 차를 세우고 굳이 걸어 올라가서 만난 기억이 나는데 개성에 있는 최영 장군 사당중 창부당에는 1930년대만 하더라도 여섯 개의 무신도 사이에 네 개의 나무 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목광대, 창계시, 소미씨, 놋도리가 네 개의 탈이다. 

탈은 크게 일곱 개의 종류로 구분이 된다. 풍농을 기원하고 악귀를 쫒으며 장례식 때 사용하기도 하고 토템으로 표현, 축제 때, 신을 나타내는 신성가면, 가면극이나 무용에서 사용하는 예능가면이 있다. 우리는 가장 많이 보는 가면은 가면극이나 무용에서 사용하는 가면으로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가면극이 생겨났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보통 사냥하는 장면이나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등을 연상하는데 생각 외로 탈을 쓴 무당도 많이 등장한다. 바다에는 고기가 많이 잡히길 원하는 마음에서 육지에서는 샤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바위에 새긴 것이 암각화다. 

이제 탈춤 문화가 전해지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황해도의 봉산탈춤, 은율탈춤, 강령탈춤 등을 보통 해서 탈춤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한반도 남부의 탈놀음이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데 해서 탈춤은 단옷날을 중심으로 연해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 번쯤은 종이탈을 만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일반 종이로 풀을 쒀서 만들기도 하지만 한지로 만든 종이탈이 오래가기도 하고 형태를 만들기가 쉬워서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올해도 원주나 다른 지역에서 탈이나 인형을 만들어본 기억이 난다. 

옷은 탈춤에서 중요한 요소중 하나다. 남부지방인 진주 일대에서 가산은 곡물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한양으로 운송하던 조창이 있던 곳으로 1893년 조창이 폐지되기 이전까지 성시를 이루던 곳으로 맨 처음에 오방신장무를 추는 것뿐만 아니라, 문둥이, 양반, 무당이 모두 다섯 명씩 등장하여 오행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가산오광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탈은 만드는 지역, 탈의 크기, 탈의 주인공에 따라 재료가 달라진다고 한다. 재료가 달라지면 탈의 표정이 많이 달라지는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종이가 많지 않아서 매우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나무나 짚, 바가지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사용했으며 놀이가 끝나고 나면 태워버렸지만 안동의 하회탈은 태우지 않고 신당에 보관했다가 다시 사용했다. 

종이탈을 만들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편면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가산오광대, 오방신장탈, 진주오광대탈등이 종이탈로 고성오광대 탈은 닥종이나 마분지, 신문지 등을 물에 불려 풀과 섞어 종이죽으로 제작한다. 그 재질감으로 인해 표면이 매끈하지 않다고 한다. 

이곳에 오면 대한민국 탈놀이의 대부분을 만나볼 수 있다. 양반의 명에 따라 꼭쇠가 사자를 끌고 와서 춤을 추고 승무가 사자춤을 인도하는 함경남도 북청군의 북청사자놀이, 고성오광대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양반들을 비판하는 정도가 심하며 담보를 잡아먹은 사자를 다시 포수가 죽이는 내용의 통영오광대, 부산의 수영과 동래등에 전해지는 수영야류, 부산 문화권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래야류 등도 있다. 

고성에는 춤의 고을 고성오광대를 만들어왔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금산 조용배와 고산 허종복이 있다. 금산 조용배는 춤뿐만이 아니라 글씨와 그림, 시와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마지막 풍류객이라고 불렸으며 고산 허종복은 평생을 고성오광대에만 헌신하며 춤을 정리하고 전수체계와 운영의 틀을 확립하여 고성오광대를 이끌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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