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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9. 2019

단재(丹齋) 신채호

민족주의 역사학을 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단재 신채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 역사학의 틀을 만든 사람으로 민족주의의 프레임에 갇힌 한계도 있지만 그 시대에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역사를 많이 정립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는데 지금 그 생가지가 복원되어 있어서 그 흔적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동구에 속한 곳이지만 이 지역은 대덕군으로 지역이 분류가 되어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는 신채호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곳이다.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동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 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다양한 잡지를 발행하면서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19년이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유는 당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조직을 만들던가 운동을 꾀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진의를 알아야 했다. 그런데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독립이라는 것이 알게 된 것이었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단재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했다는 것이 조금 독특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을 보면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던 것을 보면 영웅의 출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80년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며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비판했던 단재 신채호는 대전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며 대전의 자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신채호는 봉건 유생에서 자강 운동가로, 자강 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환하였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을 보면 유연한 생각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냥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도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였으며, 감옥에 있으면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던 신채호의 흔적이 이곳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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