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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4. 2019

금오서원

의지를 성실히 한다. 

사서삼경 중 '대학'을 살펴보면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남들을 모두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반드시 격물치지에 힘을 쓰는 경지가 있는 다음에 이치가 밝아지고 마음이 한결같이 되어 발현되는 것이 자연히 진실해진다고 한다. 홀로 찾아본 금오서원은 경사를 이용해 만든 곳으로 그 웅장함과 기세가 멋들어진 곳이다.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2년(선조 35) 부사 김용(金涌)에 주도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금오산과는 거리가 있는데 왜 금오서원인가 했더니 최초에 세워질 때 금오산 자락에 세워져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재산과 관련된 것은 주로 큰 것을 좋아하지만 마음이 좁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마음이 넓으니 몸이 편안해진다는 말은 진리이기도 하다. 이곳을 만들게 한 야은 길재선생은 충신과 효자로 인물평을 받는 것이 절대적이지만 충신으로도 가장 많이 회자되기도 한다. 

금오서원에 경내 건물로는 상현묘, 정학당, 동재, 서재, 읍청루, 고직사 등이 전학후묘의 형식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구미에서 금오라는 이름은 가장 사용이 많이 된다. 금오산이 구미의 주산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구미를 아우르는 정기가 금오산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라고 하면 보통은 권력과 연결되어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못 할 일이 없이 다 할 수 있다는 대단한 능력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능력도 필요하다. 

금오서원에 모셔진 야은 길재선생에 대해서 임진왜란 때 조정을 이끌었던 류성룡은 지주중류비에 새긴 글을 통해서 길재는 이익과 욕망에 흔들림 없는 본심을 황허의 급류 가운데 우뚝 서있는 바위산인 지주(砥柱)에 비유하기도 했다. 

금오서원을 둘러보는 길은 잠시의 여유이며 인문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열린 공간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어제 지인과 막걸리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수련에 있어서도 즐겁게 행하는 사람은 따라가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곳은 정학당으로 강당으로 사용이 된다. 중앙의 3칸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5량 형식의 가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걸림이 없게 편안하게 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때만 행하고 어떤 사람은 힘써 열심히 행한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자함에 가까우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맹함에 가깝다."

금오서원이 자리한 선산읍은 이중환 ‘택리지’의 구절로 특히 선산 ‘장원방(壯元房)'에서 등장한다.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조선조 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산에서는 총 36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됐다. 이 중 장원방 마을에서만 무려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고 한다.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 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금오정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선산의 앞을 흐르는 감천 너머 물목 마을 뒤 황산(皇山)은 수컷인 봉이 암컷인 황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금오서원 왼편에는 봉수대와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녹색길’의 시작 지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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