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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향교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성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

요즘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운동을 할 때 힘을 주어 어떤 물체를 가격할 때 초반에는 똑같은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끝의 결과는 엄청나게 많은 차이가 난다. 그래서 자신을 다스리고 계속 연습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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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독특하게 지어진 건물이 있는 안성향교다. 안성향교에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풍화루(風化樓)가 보존되고 있다. 향교에서 향의 의미는 가장 밑에 있는 하급 행정구역을 의미한다. 즉 가장 밑에까지 교육을 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만든 것이 향교이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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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향교로 가는 길에는 굴다리를 지나서 올라오면 고목이 나오고 그 앞에 안성향교를 상징하는 풍화루가 나온다. 향은 부곡과 더불어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며 국가에 대하여는 공과(公課)·공역(公役)을 부담하였고, 호장(戶長) 등 토착 관리에 의하여 통제되는 곳이기도 했다. 향교의 향은 좋은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향인(鄕人)은 소(所)·부곡(部曲) 주민과 같이 일반적인 양민과 달라서 그 신분이 노비·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 계급의 지위에 있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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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집안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평등한 교육을 지향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안성맞춤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안성시의 안성향교에서는 적지 않은 인물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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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광역시나 특례시로 승격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은 그만큼의 혜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난민을 위무(慰撫)하게 하는 등 회유책을 썼던 망이 망소이의 난 역시 행정구역의 승격을 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반란과 구별된다. 안성향교에서 출발하는 산행은 비봉산을 등산하는 코스로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의 길을 걸어보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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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에서 배움에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단속을 하면, 또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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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향교는 1533년(중종 2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중건하였으며, 1969년에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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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에 가서 안성에 거주하는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성이라는 곳이 주변의 격하게 성장하는 곳과의 다른 점과 안성시만의 매력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안성시는 무언가 에너지가 축적된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파트를 바라보는 곳에 남겨져 있는 안성향교는 배움과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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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인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 공자


지렛대 원리라는 것은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대부분 많이 알 고 있다. 작은 힘으로도 큰 것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은 힘에 약간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들어 올렸을 때 큰 차이가 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만의 가치를 가진 것은 오래된 것들의 힘이다. 안성향교는 500여 년의 힘을 가진 그런 예스러운 공간이다.


안성향교(安城鄕校)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호

경기 안성시 항교길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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