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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4. 2019

지키는 것

괴산 화양서원의 우암 송시열 유적

송시열은 조선 중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학자이면서 정치가이다. 화양동華陽洞으로 온 우암尤菴 은 북벌北伐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이미 중국의 전역을 차지했지만 끝까지 명에 대한 사대에 대한 생각을 접지 않았다. 송시열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정신이었다. 명나라가 사라짐으로 인해 근간을 지키는 정신이 흔들리는 것을 끝까지 막고 싶었던 것이다. 즉 그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인륜도덕의 명분이었다. 

화양구곡의 첫인상은 얼음이 얼어 있는 가운데 적막하면서도 고요한 느낌이었다. 봄에 오면 혹은 여름, 가을에 오면 어떤 느낌이 들지가 궁금해진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비에 희미하지만 글씨가 쓰여 있다. 시설이나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도 세금을 내며 살아간다. 자유롭게 시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거래하였고 관리는 단지 그것을 감독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천한 사내가 있어 항상 사방이 훤히 보이는 높은 곳(농단)에 올라가서 좌우로 둘러보고서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하듯 싹 거둬가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시장에서의 교역에 대한 세금의 징수는 그렇게 출발한 것이다. 

이 앞에 보이는 바위는 화양구곡 중 제3곡으로 우암 송시열이 조선시대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을 크게 슬퍼하여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읍궁암으로 불리고 있다.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인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22년(1696)에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지금은 괴산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말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횡포가 심해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 폐해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이었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으로 발송하는데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고 한다. 

화양서원에는 송자사를 출입하는 문으로 세 성현을 잇는다는 의미를 지닌 승삼문(承三門),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유의재(由義齋), 서원의 강당으로 화양서원 사액현판을 걸었던 일치당(一治堂), 강당과 동서재로 통하던 중문인 개래문(開來門) 등이 있다. 

'아방가르드 송자' 

화양서원에서는 문화재 활용사업이 진행이 되는데 4월부터 11월까지 2/4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서원 체험, 달빛 체험, 예악체험, 역사체험, 생태체험을 한다. 그리고 여름인 7월에는 꽃나들이를 하고, 10월에는 음악제를 한다. 올해에도 비슷한 활용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삶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며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었다. 그에게는 북벌의 명분은 바로 세상을 바로 세우는 것에 있지 않았을까. 

"오곡은 곡식 중에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여물지 않으면 비름이나 피만도 못하다. 인의 가치 역시 여물게 하는 데 달려 있다."


화양서원 역시 일제의 만행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영정과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화양서원 내 만동묘와 묘정비는 일본으로서 지워야 할 역사였다. 

100여 년 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묘정비의 비문을 징으로 세밀하게 쪼아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뒤 인근 개울가에 파묻었는데 광복 후 이를 복원했지만, 아직도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 파괴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비는 1716년 숙종대왕 어필 편액을 하사 받았고 화양서원 묘정비(華陽書院廟庭碑)를 세운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서원에서의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나 태도를 갖추고 있지 못할 경우, 비록 그가 원하더라도 거절할 수 있으며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도 바로 가르침이 된다고 한다. 화양서원에 와서 문득 든 생각은 내가 가르침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나를 돌아본 것이다. 


화양동 기이한 절경이 파천계곡에 있어       華陽奇絶在巴溪

돌 모양이 편편하고 다 깨끗하네.               石勢鋪張儘潔齊

물의 근원 찾아 탁 트인 곳 이르러              溯源看到豁然處

선생 추억하며 지팡이 신발 놓고 쉬어가네.   追憶先生杖履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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