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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2. 2019

홍범식 고가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라

금산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쓰는 편이라서 홍범식이라는 사람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바로 직전까지 금산에서 군수를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금산에서는 그를 금산의 인물로 말하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게다가 홍범식의 아들인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1909년에 금산 군수로 부임하고 나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금산 군수로만 알고 있었던 홍범식은 괴산 사람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충북 괴산(槐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뿌리를 찾아서 올라가면 사도세자의 비이면서 실용적인 군주였던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 씨 집안이기도 하다.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될 때 한반도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는데 비분강개하면서 자결한 군수로는 유일하다. 괴산읍은 동진천과 성황천이 싸고도는 형국의 지리를 보이는데 홍범식 고가가 자리한 곳은 동진천이 흐르는 곳이다. 동진천은 소수면 길선리에서 발원해 괴산읍 소재지를 지난 다음 대덕리에서 달천과 합류하는 길이 18㎞의 지방하천이다. 

홍범식 고가의 사랑채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중부지방 양반가의 살림집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홍범식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 홍명희는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 고향 괴산 땅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아 복역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독립지사 또는 민족 지도자로 주목받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복원된 고가라서 그런지 고택이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고는 하나 홍명희는 당시의 현실을 직시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일제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와 사회에 보수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분열과 이견을 지양한 새로운 줄기라는 뜻의 신간회(新幹會)의 이름을 짓고 활동하였다가 일본에 의해 해소되자 10년간에 걸쳐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도로명 주소가 생겨나고 나서 그 지역을 알리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지역명으로만 불리던 것이 그 지역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도로이름을 정한 것이다. 괴산에는 임꺽정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2018년에도 괴산군은 이곳 홍범식 고택을 활용하여 문화재활용 사업을 진행하였다. 괴산군이 주최하고 문화학교 숲이 주관한 이 사업은 ‘홍범식 고가에서 열리는 신나는 이야기 여행’ 프로그램으로 지난 3월 시작해 10월까지 매월 1, 3주 토요일 운영했었다. 

복원된 고가라서 아궁이나 옛날 방식으로 군불을 지피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이 고가는  1730년(옹정 8년) 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고가인 동시에 3·1 운동과 관련된 유적이기도 하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오면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 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측면 6칸의 ‘ㄷ’ 자형으로 ‘一’ 자형 광채를 맞물려 있는  ‘ㅁ’ 자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말 공화정의 길과 황제의 길이 앞에 놓여 있을 때 대다수가 공화정의 길을 원했으나 고종은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사례(결국 없어진 제국)를 반면교사 삼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나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잃고 홍범식은 이에 자결로 삶을 마무리한다. 


일완 홍범식 고택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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