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의 풍운아

한 시대의 다른 풍운아 김옥균과 사카모토 료마

교수 : 지금까지 조선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이야기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야.

진수 : 흥선대원군이 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교수 : 조선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풍운아이야기를 빼놓으면 안되지.

진수 : 마지막 풍운아라면 혹시 김두한인가요? 영화나 드라마로 등장했었으니 유명인물이긴 하죠.

교수 : 아쉽게도 김두한은 아니야. 김두한은 그냥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 국가를 위해 살았던 사람은 아니니까. 오늘의 주인공은 김옥균과 사카모토 료마야.

진수 : 김옥균은 알겠는데 사카모토 료마라면 일본 사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교수 : 둘 사이에는 16년의 나이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이 있어. 둘 다 개화를 통해 나라를 바꾸려고 했었고 실제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기존 정권의 비호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지.

MG0A5531_resize.JPG 김옥균 선생 유허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진수 : 그렇게 말하니까 기억나요. 명탐정 코난 시리즈를 다 봤는데요. 거기서 료마 특집이 있었거든요.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는데 유명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교수 : 료마가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1962년부터 1966년에 연재된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 때문에 였어. 그 이후로 메이지 유신의 숨은 영웅으로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자리한 거지. 사실 료마는 변변치 않은 집안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반면 김옥균은 몰락했더라도 안동김씨와 응진송씨 가문에서 태어난 엄친아였어.

진수 :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출발은 달랐었군요. 그럼 료마는 가난했었 던거에요?

교수 : 그건 아니야. 그가 태어난 도사 번은 무사 계급은 상사(누士)와 하사(下士)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사계급의 사카모토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유복했었거든. 계급상으로 그렇다는 거지. 료마는 처음에는 혁명가로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1851년에 태어난 김옥균은 7살 때 당숙인 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다가 1872년 (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등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닦아나갔어.

진수 : 정계거물들까지 배경에 있었는데 왜 실패한거에요? 그리고 당대의 개혁가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MG0A5534_resize.JPG 고균 김옥균선생 유허비

교수 : 김옥균이 속한 개화파는 통리아문 설치, 군제개혁, 공업건설, 농업, 임업, 어업의 개발등을 추진하는 개화운동을 추진하고 일본에 1879년에는 일본 근대화를 파악하려고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하고 그 자신도 1882년에 일본 정치가와 민간 지도자들과 만나 토론을 하는 등 조선을 바꿀 방법을 모색했어. 그때는 이미 료마가 살해당한 지 15년이 지났기 때문에 만날 기회는 없었어. 이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급히 서울로 돌아온 김옥균은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급격하게 추진하지만 실세인 청을 배후에 둔 민씨정권의 방해로 제약을 받았어.

진수 : 그럼 김옥균이 그런 한계가 있었다면 료마는 어떤 행보를 보인건가요?

교수 : 료마는 무사가문답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1853년 에도로 유학간 뒤 지바 도장에서 북진일도류 (北辰一刀流)를 배우게 돼. 검도를 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북진일도류는 현대 검도의 원형이 된 검술의 유파야. 처음에는 료마는 외국세력들을 배척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론자들과 사귀었어. 이후 유학자이던 가와다 쇼료에게 서양에 대해서 배우고 사형에 처해질만큼 중죄였던 탈번을 감행한 해에 가쓰 가이슈를 만나 제자가 되면서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바뀐거지.

진수 : 한 번 생각한 신념을 그렇게 바꿀 수 있을 정도면 스승이 대단한 사람이었나 봐요. 결국 시대의 한계도 인정한 것이잖아요.

교수 : 아마 그 점이 김옥균과 료마의 큰 차이점 이었을거야. 김옥균은 이후 수신사로 가기도 하고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에 가면서 메이지유신의 성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되지. 요직의 자리에 있었던 김옥균이었지만 지지기반인 개화파의 세력이 축소되면서 아직 덜 익었지만 과감한 방법을 시도하려고 해. 그가 생각했던 혁신정강의 상당부분은 료마가 생각했던 선중팔책 (대정봉환, 상하의정국 설치, 외교혁신, 관제개혁, 인재등용, 법전의 제정, 해군 확충, 어친병 설치, 폐제 개혁)과 닮아 있어.

진수 : 어떻게 보면 같은 꿈을 꾸었지만 그걸 실현하는데에는 다른 행보를 보였네요.

교수 : 료마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인데 교토에 해군 훈련소 설립을 위해 에치젠 국 후쿠이 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 슌가쿠를 찾아가 그 자금 천냥을 빌리는데 성공했어. 조선도 당시 재정이 부족했지만 돈 많은 지주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이 보인 행보와는 전혀 달랐던 거지. 186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도 조선과 비슷하게 막부세력이 쇄국정책을 주도하고 있었어. 메이지 천황을 위시한 세력과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한 세력간의 팽팽한 다툼은 1867년 료마의 선중팔책을 기초로한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으로 자리 잡은 후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으로 넘어가면서 종식을 맺게 되지. 이것이 일본이 근대화 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거야.

진수 : 료마가 그 기반을 마련한 메이지 유신은 성공했지만 김옥균의 갑신정변 (1884)는 실패한 거군요.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지만 씁쓸해 보이는 역사적 결과네요.

교수 : 맞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불과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끝이 나지. 어떤 사람들은 시민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들이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김옥균은 그들만의 개혁을 꿈꾼거지 백성들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거든. 당시 백성들은 그냥 나라에 변고 하나가 생겼구나 라고 생각을 했지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정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진수 : 이제 두 사람이 암살당하는 일만 남았겠네요.

교수 : 공교롭게도 김옥균과 료마 모두 자신이 생각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던 나이가 33살이었다는 점이야. 다른 점이라면 료마는 정권이 넘어갔다는 대정봉환 한 달 뒤에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고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오고사와라 섬, 삿포르, 도쿄등으로 망명 생활을 한 뒤 1894년 상하이로 가서 청의 이홍장과 담판하려고 시도하다 민씨정권이 보낸 자격 홍종우에게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돼. 김옥균가 생각했던 개혁정책의 한계는 조선 백성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일본세력을 끌여 들여서 조선을 바꾸려고 했다는 점이지. 반면 료마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하부세력들의 지지도 이끌어내고 삿초 동맹 (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이끌어내는 등 내부 규합에 성공했어.



MG0A1716_resize.JPG 료마가 1867년 암살되었다는 교토의 한 거리

진수 : 거대한 흐름의 변화을 맞이했던 인물 두 사람의 인생이 조금은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바꾸려고 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다른 기억으로 남았네요.

교수 : 앞으로도 변화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고 내부적으로 소양을 쌓는 것이 필요할거야. 좋은 시절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니까.

진수 : 오늘 몰랐던 료마 이야기와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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