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고택

구미의 쌍암고택

건물이라는 것은 자연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건축물의 설계가 맥락에 반응하거나 연관이 되어 있어야 오래도록 지속가능성이 있다. 고택은 '유형'으로서 도시를 재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지식과 경험은 특정한 문화와 물리적인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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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있는 고택들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오기에 그분들의 사생활도 중요하다. 그래서 간혹 취재할 때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구미를 대표하는 고택으로 쌍암고택은 국가 민속문화제 제105호로 지정된 곳으로 북애고택과 함께 그 자리에 꾸준하게 남아서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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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 보이는 북애(北厓) 고택은 쌍암고택의 북쪽 언덕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후일 큰집이 안쪽에 있어야 한다는 정서와 새집이라는 이유로 동생 댁이 형님댁과 집을 바꾸자 해 서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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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회관 옆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쌍암고택은 400년 전 해평에 정착한 입향조 검재 최수지의 10대손인 농수재 최광익(1731~1795)이 큰아들 성우의 살림집으로 지어준 집으로 송호공 최수의 넷째 광익이 1755년(영조 31) 큰아들 살림집으로 지어준 집이 쌍암고택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앞쪽부터 차례대로 행랑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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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동학운동이 있다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쌍암고택에는 빗돌이 하나 있는데 '甲午東學農民軍集結地(갑오동학농민군 집결지)-朝鮮開國五百三十一月(조선 개국 오백 삽실일 월). '선산 해평 갑오농민전쟁 전적지'라는 표석도 나란히 서 있다. 쌍암고택은 당시 일본군이 해평에 설치한 병참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갑오전쟁 농민 의병들은 쌍암고택에 설치된 일본군 탄약 기지본부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선산의 향리가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해 대대적인 공격을 했으며 농민군은 선산에서 밀려나고 이후 경북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 그리고 감영에서 파견한 진남영병에 의해 궤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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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고택은 조금 특이하기도 하다. 집구석구석에 농기구와 가재도구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데 좌우 빈터에는 잡초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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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쌍암고택을 보존해 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쌍암이라고 불렸던 두 개의 바위와 함께 다른 고택들도 소실되었지만 쌍암고택과 북애고택이 구미를 대표하는 고택으로 자리한 것은 우애가 있는 집안의 가풍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물건들과 제도에서 규칙에 따르는 건축술이 적용되듯이 건축에서는 이를 유형이라고 부른다. 고택이라는 유형 속에는 삶의 향기가 녹아들어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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